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항전지이자 피난처였던 이곳은 천연요새로 일컬어질 만큼 지형과 지세가 험난한 곳이었다. 공주감영군과 민병들을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토벌을 계획하고 1895년 2월 17일(양력) 새벽 5시에 일본군(3개 분대), 관군(30명)이 공격하였다. 이때 어린 소년을 제외한 동학농민군 25명 모두를 사살하였고 접주 김석순은 천길 계곡으로 투신해 자결하였다. 농민군의 처참했던 당시의 모습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증내용
도적 수백 명이 고산현의 석굴을 거점으로 삼아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으나 이도재가 군대를 파견하여 섬멸했다. 『번역 오하기문』, 322쪽.
고산읍 산후동에 한참산(=대둔산)이 있는데 꼭데기 봉우리는 마천대입니다. 지금 이름 있는 적괴가 도당을 불러모아 바위 소굴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부근의 적들이 자주 그들과 몰래 붙어 다닌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흉도들을 곧바로 공격하여 없애지 않으면 마땅히 세력이 커질 근심이 있습니다. 『의산유고』 권1.
“17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대둔산의 적도들이 또 마음대로 창궐하여 진산 군관 하경석(河景奭)과 금산에서 온 수비병을 죽였으며, 또 연산 동면(東面)의 비도들이 그들 무리들에게 내응하여 장차 급하게 화가 일어날 기운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산유고』 권1.
별군관 윤지영·김광수가 교장 장세복과 병정 30명을 거느리고, 일본 특무조장(特務曹長)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와 전 순무영 별군관 오인경(吳仁庚)이 일본병사 30명을 거느리고 대둔산 적을 토벌하려고 같이 대둔산으로 갔다. 『양호우선봉일기』.
2월 초3일, 본진의 별군관 윤지영·김광수가 보낸 수본에 근거하여, ‘대둔산의 적을 격파한 일’을 군무아문에 베껴서 보고한 것에 대한 제사(題辭)에, “책자로 만들어 바쳤거니와, 남은 잔당들을 토벌하여 흩어버린 것은 더욱 가상하다. 『양호우선봉일기』.
이시쿠로 대위에게 대둔산(大屯山)의 적도를 초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16일(1895년 2월)에 조선 국왕 폐하로부터 칙사를 통하여 위로의 칙어 및 물품을 받았다. 『미나미 고시로 문서』, 「경력서」.
동 21일에 이시쿠로 대위로부터 대둔산의 적도를 초멸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 22일에 공주를 출발하여 유구촌에 도착해 사영하였다. 동 23일에 이시쿠로 대위에게 지나 잔병의 포박 방법 및 용산에 도착할 예정일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나미 고시로 문서』 「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