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2월 10일 농산읍(農山邑)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게 대패함.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진안으로 퇴각했고, 히라키 조타로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진안으로 추격을 시작함. 일본군이 고산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위치한 진안의 동학농민군을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음
정천면 상조림 일대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현재 진안초등학교 뒷산과 성묘산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음
1894년 12월 12일 오전 11시에 일본군은 진안현 동부에 도착하였고, 전열을 정비하던 동학농민군과 약 1시간 가까이 교전함. 교전 결과 동학농민군은 패배하여 퇴각하였고, 오후 12시 10분 무렵 일본군은 진안현을 점령하게 됨
전투결과 동학농민군 전사자는 13명이고, 일본군 전사자는 없는 것으로 집계됨. 동학농민군이 보유했던 불탄 화승총 70정, 탄약 150관, 조선돈 300냥, 불탄 창 12자루, 깃발 10폭, 전선 2다발 등을 일본군이 노획함
진안읍 일대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고산의 운장산으로 도주하였고, 일본군은 그 뒤를 추격함. 곧 고산 산천리 전투와 고산 전투로 이어지게 됨
고증내용
「순무사정보첩」: 갑오 11월 22일. 16일에 진안읍에 도착하여 또 저들 수천 명을 만나 한바탕 접전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고 17일에 고산읍 산천리에 도착하여 저들 수백 명과 접전하여 30여 명을 죽였습니다. 18일에 고산읍에 도착하여 또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는 저들을 만나 한바탕 혼전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생포한 동도 30명 가운데 이른바 접사(接司)인 고산에 사는 이만학(李晩學), 여관서(呂寬西)와 진안에 사는 김치서(金致西) 등 세 놈은 우선 잡아 가두었고 김성도(金聖道), 임성원(林聖元), 김중이(金仲伊) 등 3명은 포살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효유해서 석방하였습니다.
「갑오군정실기」 권6: 11월 26일. 교도 중대장 이진호가 첩보합니다. …(중략)…11월 16일 진안에 이르러 또 동도 수천 명과 맞닥뜨리게 되자 접전하여 수십명을 사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