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9월말 진천에서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한 동학농민군은 음성 무극 장터와 진천 덕산 구만리 장터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10월 6일 다시 북쪽과 남쪽 두 길로 나누어 괴산으로 향하였다. 천도교쪽 자료에 의하면, 이들 동학농민군은 보은으로 향하던 충주의 홍재길, 이용구, 신재련, 안성의 정경수, 이천의 고재당, 음죽의 박용구 등이 이끄는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들이었다.
이들 동학농민군이 괴산 입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무렵, 또 다른 동학농민군부대가 괴산 관아를 공격하였다. 괴산 아전들과 일부 주민들은 저항하였으나 우세한 동학농민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아전과 주민 11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5백여 채의 집이 불탔다. 이때 괴산의 서접주가 피살되었는데, 그의 13살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관아에 몰래 들어가 방화하였다. 이 방화로 괴산 관아와 민가들이 불타버렸다. 괴산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보은으로 떠나갔다.
고증내용
1894년 10월 6일경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괴산 관아터에는 동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충북 유형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괴산동헌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로 부재의 꾸밈은 매우 간소 처리되었다. 동헌 건물이 있던 이 부근 일대는 조선시대 객사와 관아건물이 자리하던 곳이었으나, 옛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동헌만 남아 돌담과 철제 구조물로 보호되고 있다. 안내판이 있으나, 동학과 관련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에는 도서관과 경찰서가 있으며, 따로 주차시설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