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전주화약 이후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곳이자 북접 농민군이 임실 일대에서 재결성 한 후 보은 방향으로 북상하던 중 점령한 곳이다.
무주관아는 1차 봉기 후 이응백이 이끄는 무주 농민군 수천 명이 점령하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 활동을 전개한 곳이다. 이후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북접농민군은 태인전투 이후 내장산과 순창 복흥을 거쳐 11월 28일에 임실 갈담에서 세력을 재정비한 후 12월 5일 무주로 입성한다. 이때 무주 장백리(長白里)에서 민보군과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북접 농민군은 무주관아를 점령하고 3일간 머물다가 12월 8일 무주를 떠났다.
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2, 2007, 353‧421쪽.
무주의 접주 이응백 삼부자가 무리, 수천여 명을 이끌고 침입하여 피해가 크다는 용담현령의 보고와 무주의 거괴 이응백을 토벌하였다는 전 경리청 우참령관의 보고
「수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3, 2008, 77쪽.
청국의 군사가 날래고 민첩하니 무주 내의 각 접주들에게 생업에 종사하고 소동을 일으키지 말며 시세를 본 후에 계획을 실천하자는 내용
「갑오척사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3, 2008, 330쪽.
농민군이 무주에서 상주로 오고 있는데 황간에 이르렀으며 그 세력이 이를 섬멸하기 위해 군대를 통솔해가라는 내용
「토비대략」,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3, 2008, 389‧392쪽.
.동도 10,000여 명이 무주읍에 들어와 읍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였다는 5일 기사 내용
.적도 30,000~40,000명이 무주에서 나와 영동, 황간을 함락하고 영동 용산에 진을 치고 있더는 10일 기사 내용
「소모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3, 2008, 448‧455‧458쪽.
.무주의 비류들이 점차 영남으로 가려고 하니 이를 방어하기 위해 추풍령을 방어하자는 내용
.호남으로 흩어져 도망갔던 적도들이 다시 무주에서부터 차례로 기포하였다는 내용
.남촌의 거괴 4놈이 9월의 변고 이후에 호서로 도망가서 최적 및 이괴와 함께 몰래 무리를 모아 무주로 가서 화를 조성하였다는 내용
오지영, 「동학사」, 『동학사상자료집』2, 468~470쪽.
무주의 접주 이응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