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설천 전투는 북접농민군이 무주에서 영동으로 이동하던 중 수성군과 맞서 싸운 곳이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은 태인전투 이후 11월 28일에 임실 갈담에서 세력을 규합한 후 보은을 향해 장수로 가던 중 12월 5일 무주로 들어와 무주 장백리(長白里)에서 무주의 민보군과 전투를 치러 승리한 후 무주관아에 머물다가 12월 8일 무주를 떠났다. 이들은 무주에서 북상해서 영동으로 향하던 중 무주 설천과 영동 월전에서 다시 무주 수성군과 맞서 싸워 이들을 격파하였다.
설천전투의 정확한 현장을 확인되지 않으나, 현재 설천면사무소 자리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설천전투에는 무주의 농민군 지도자 이응백도 가담하였을 것으로 이응백은 1895년 1월 10일 관군에 체포되어 무주 시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이곳은 북접 농민군이 무주 수성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곳으로 의미가 있다.
고증내용
「감영보고문」
적도 수만 명이 무주로부터 영동에 이르면서 설천과 월전의 의병을 격파하였는데 그 수는 12만 명이며 적도들이 청산과 상주를 함락하겠다고 하였다는 12월 8일 청산교리의 보고
「소모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448쪽.
초 9일 [初九日]
”맑음. 진시에 초장 2명이 뜻밖에 찾아왔다. 이들이 가지고 온 유격장의 편지를 보니, “영동 수령의 급보 내에, 호남의 비도들이 무주(茂朱)의 설천(雪川)과 영동의 월전(月田)에서 의병과 접전을 하였는데 저들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 의병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사태가 매우 위급하므로 밤을 새워 달려와서 구원해달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선 영리한 아전 2명을 급히 보내어 탐문하도록 하고 초장과 병정을 유격대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
별계
갑오년 12월 28일 별보
“본래 안성포(安城包)와 관동포(關東包)로서 월전(月前)에 호남에서 누차 접전(接戰)한 것이 17차(次)나 되는데 이달 초 6일에 무주에 들어가 설전과 월전 두 곳의 의병을 공격하여 무찌르고, 영동읍을 함락시키고 황간의 무기를 탈취한 뒤 전진하여 영동 땅의 용산(龍山) 저자를 점거하고 수석(水石) 이판서(李判書)의 집 및 정씨(鄭氏) 양반 두 집과 죽전(竹田)의 민호 40여 집을 불태우고 이 판서의 종놈 1명과 노씨(盧氏) 양반 2인을 총살하였습니다”라는 내용
「討匪大略」, 『동학농민혁명총서』3. 2008, 309쪽.
12월 5일 기사
.동도 7,000명이 또 무주를 무너뜨리고, 영동(永同)·상주(尙州)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