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들은 무장을 출발하여 고창을 점령하고 이어 4월 7일 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과 싸워 승리한다. 그러나 홍계훈이 지휘하는 경군이 전주에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로 향하던 기수를 돌려 고부군 삼거리에서 숙영하고, 8일 흥덕현과 고창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고창현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고창읍성 안으로 들어가 옥에 갇혀있던 동학교도 7명을 석방하고 호적과 장적, 기타 문기류, 군기를 탈취하고 관아시설을 파괴하였다. 이때 현감 김사준은 도주하였다. 이어 농민군은 읍성 앞에 살고 있던 고리대금업자인 부호 전 대정(大靜)현감 은수룡의 집을 불태웠다. 이때 전봉준은 억울한 죄수를 풀어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무엇보다 농민군들에게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게 하여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증내용
「隨錄」 -4월 22일 오시(오전 11~오후 1시) 무렵 농민군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북치며 나팔을 불고 총을 쏘았는데,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고창의 경계에서부터 본 현의 사후포(沙後浦)에 이르러 머물러서 숙박하였다는 내용.
「聚語」,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 2007, 77~78쪽.
「兩湖招討謄錄」, 1894년(光緖 20) 4월 12일
-4초 8일 술시 경에 농민군 수천 명이 곧바로 고창 관아에 들어와 먼저 옥문을 부수고 갇혀있는 동도 7명을 멋대로 내보내고 이후 무기를 탈취하고 여러 문서를 거두고는 동헌과 각 관용건물을 부수고 관인을 탈취하려 했다는 내용.
「兩湖招討謄錄」,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 「兩湖招討謄錄」,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 111쪽.
『오하기문』 1894년 4월 9일
같은 날,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나온 고창현의 보고에 의하면 무리 수 천명이 흥덕에서 고창현으로 들어와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고 무기를 약탈했다는 내용
황현,『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2016,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