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강릉부 정동면 이회원으니 선교장은 19세기 강릉 경포 일대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주문진 일대, 남으로는 묵호, 삼척, 영서의 대화, 하진부에 걸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대지주 가문으로 ‘만 석꾼’이라 불렸으며영동 일대의 대표적인 양반 지배층이었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 자리에 집을 지은 후, 1815년(순조 15)에 오은처사 이후(李厚)가 사랑채인 열화당을 건립하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1816년(순조 16)에 이근우(李根宇)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사당·정자·행랑채를 골고루 갖춘 큰집으 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1965년 중요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었다.
선교장 어디에도 선교장 주인이었던 이회원이 1894년 강릉부사와 관동소모사를 지내 면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던 역사는 찾아볼 수 없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안중근의사가 ‘황해도 지역 동학군에 대항해 부친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용맹을 떨침’이라고 밝힌 사례를 참조하여 이회원의 행적을 알릴 필요가 있다.
고증내용
1894년 강원도 동학농민군 토벌을 지휘한 이회원의 집
이 때 본읍의 정동면 선교의 이승지가 임금의 은혜를 받아 성묘하려고 고향에 왔다가 한양에 가지 못하고 길이 막혀 버렸다.(<임영토비소록>(<<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72쪽 ㅇ9월 6일 날에 비도들이 말하기를 “내일 선교에 들어가겠다”라고 하여 위험이 눈앞에 있게 되 었다 이 날에 정과 최 두 아전이 은밀히 비도를 토벌하는 논의를 이미 끝냈고, 정동면도 한밤중에 북문 안 군기고 앞에 와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이승지가 바로 사람을 각 마을로 보내어 이런 뜻을 은밀히 알리는 한편, 사람들로 하여금 쌀 100말과 돈 100민을 가지고 가게 하여 비도들을 위해 점심과 저녁밥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선교에 들어오는 것을 늦추려는 계획이었다. 그날 밤에 5-6개 부근 마을에서 몰래 군정을 모아 배부르게 먹이고 단단히 채비하여 말하기를 “북문 안에 들어가지 말고 읍후에에 가서 일어날 때를 기라리다가 읍내에서 나는 신호 를 듣고 일제히 일어나라. 만약 읍에 신호가 없으면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라고 훈계하였다. (<임영토비소록><<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76쪽)
마침내 남쪽으로 길을 잡고 아전들에게 비밀리에 알려서 초저녁에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 어나 각자 단봉을 들고 동문에 난입하였다 동남문 밖과 각 관아의 문 앞에는 시체가 이미 땅에 널려 있었다. 당일 밤에 죽은 자가 모두 100여 명이라고 말했는데, 다음날 아침에는 20-30명이라고 하니, 밤새 많이 살아서 가버린 것인지 많이 죽은 것을 읍인들들이 놀라서 숨긴 것인지 모르겠다.(<<임영토비소록>><<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79쪽)
9월 26일 정부에서는 공관상태인 강릉부사에 이회원을 임명하고 농민군에 대한 방비와 토벌 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도록 하였다.(<<일성록>> 9월 26일, <<구한국관보>> 1, 개국 503년 9 월 26일)
10월 22일 강릉부사 이회원을 간동소모사로 임명하였다(<갑오군정실기> <<동학농민혁명신국 역총서>>6, 242 쪽)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이 도적들의 본래 모습이니 철저히 소굴을 타파하여 훗날의 염려 가 없도록 하라. 소용되는 군수는 내가 창고에서 낼 터이니 조금도 백성에게서 거두지 말라“고 하였다. <임영토비소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8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