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손화중은 정읍에서의 포교활동이 어려워지자 고창 무장지역으로 활동지를 옮겼다. 처음에는 무장현 읍내의 김모 집에 도소를 마련하였다가 괴치리의 양실마을로 옮겼으며, 이어 이곳, 사천에서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 당시 최부자집으로 불린 이 도소를 중심으로 손화중은 인적·물적자원을 학보할 수 있었다.
괴치리 주민 정휴관옹의 “갑오년 여름 나주성 싸움에 나갔던 농민군들이 암치를 넘어가는데 그 행렬이 십리지경에 뻗었다”라는 증언에서 나주정벌군이 괴치리 손화중포를 중심으로 집결하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거주자인 정동환은 당숙으로부터 이곳이 도소로 쓰였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주민들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 본래 본채와 사랑채가 ㄱ자 형태로 있었으나 당시의 집은 멸실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복분자가 심어져 있다.
고증내용
신용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49쪽.
무장의 동학세가 확대되어 가고 있을 무렵 손화중이 무장에 들어와 도회소를 설치하였으며 이 도회소를 거점으로 한 포교활동은 교세를 더욱 확대시키는데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는 내용
오지영, 『동학사』,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금강출판사, 1980, 217쪽.
손화중은 무장 읍내 김모씨의 집에 포교소를 두었다가 이웃 괴치리 사천마을(현 고창군 성송면)로 다시 옮겨 자리를 잡았으며 이곳에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할 지도자들과 교유하게 되었다는 내용
우윤,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한국현대인물연구Ⅰ, 창작과 비평사 1992,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금강출판사, 1980,
정성미, 「동학농민혁명지도자 손화중의 지역적 기반과 활동」, 『동학학보』, 동학학회, 2017. 12, 439쪽.
『손화중 관련 유적지 및 자료 실태 조사보고서』 , 사단법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08, 8, 12쪽.:정동환 구술. 정휴관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