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선황산은 부안읍 관아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1894년 4월 5일 전주 진격을 위해 부안지역의 농민군과 태인 쪽으로 온 정읍 농민군 등이 주둔했던 곳이다.
1894년 3월 20일 무장기포 이후 농민군은 고창, 흥덕, 부안․ 정읍, 고부, 태인 등지를 점령하며 전주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4월 2일 금구까지 진격하였으나, 감영 포군 1만여 명이 농민군을 치러온다는 소문을 듣고 4월 3일에 다시 후퇴하였다.
후퇴한 농민군 주력부대는 태인현 용산장(龍山場)에 들어와 숙영하고 이튿날 일부는 부안으로 진격하여 이미 모여 있던 농민군과 500여 명과 함께 동헌을 공격하였다. 현감과 공형을 구금·결박하고 무기를 탈취한 후 4월 5일 부안 성황산으로 옮겨 진을 쳤다. 이때 정읍에서 올라온 농민군을 비롯한 5개 읍의 농민군과 집결하여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다음날 농민군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부안을 빠져나와 고부의 도교산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이어 4월 7일에는 황토현 전투가 벌어졌다.
고증내용
「수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7, 20쪽.
4월 초 5일 오시에 낸 부안의 공형 문장에서, “…그날 오후에 본 읍의 동헌에 모였던 저들 무리들이 본 읍의 주산(主山)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이주하여 주둔하였으며, 정읍에서 온 자들 또한 수백 명이었는데, 그들이 합세한 연유를 보고합니다”라는 내용
「통비토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7, 95~96쪽.
초 6일 [初六日]
“동도가 부안의 동헌에서 본읍 뒤의 성황산(城隍山)에 옮겨와서 주둔하였는데, 5개 읍에서 온 자가 모두 수만 명이 되었다. 해당 수령은 놀라서 가만히 있고 군대를 출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주족(走足)이 탐문해 온 것을 보니, 잠시 영군(營軍)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 연이어 초토사(招討使)에게 지시하여 군대 200명이 어제 신시(申時)에 먼저 배에서 뭍으로 내렸고 연이어 1,300명이 도착하였다”는 내용
황현,『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2016, 137쪽.
4월3일 기사
저 무리 500여 명이 우리 현(부안현)의 하동면(下東面)에 떼를 지어 모여 있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