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최시형은 1871년 3월 영해 교조신원운동 이후 이필제, 강시원, 전성문 등과 함께 단양으로 피신한 뒤 강원도 영월, 정선 등지를 옮겨다녔다. 1874년 3월 안동김씨와 재혼한 최시형은 4월 10일경 가족과 일부 교도를 거느리고 단양 사동에 거처를 마련해 살다, 일년 뒤 옆마을 새두둑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1875년에 단양 새두둑(송두둑) 마을에 정착한 최시형은 이곳에서 약 10여년 간 비밀포교와 교단 재건활동을 벌였다. 그 일환으로 1880년에 강원도 인제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1881년 5월에는 새두둑 마을과 이웃한 단양 대강면 장정리 샘골(현 단양군 대강면 남천리) 여규덕의 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는 충남 목천에서 동경대전을 또다시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단양에 기반을 둔 최시형의 포교 활동과 경전 간행에 힘입어, 동학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날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그러자 충청감사와 단양군수는 1885년 6월경 최시형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이에 최시형은 동학 거점을 보은 장내리로 옮겨 활동하였다.
고증내용
1881년 6월에 동학 경전 용담유사가 간행된 곳으로, 이에 대해 천도교서에는 “신사(辛巳) 6월(月)에 신사(神師) 대신사(大神師)의 소저(所箸)하신 가사(歌詞)를 발간(發刊)하사 도인(道人)에게 영급(領給)하시니 시시(是時) 개간소(開刊所) 단양군(丹陽郡) 남면(南面) 천동(泉洞) 여규덕(呂圭德) 가(家)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간행된 용담유사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계사판(1893년)이다.
현재 용담유사가 간행된 단양군 남면 천동(샘골)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천동리가 되었다가, 1917년 다시 남천리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담유사가 간행된 여규덕의 집터는 알 수 없으며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해월 최시형 순도 100주년을 맞아 마을 입구에 ‘천도교 경전 용담유사 간행지’ 기념표지석을 1998년 3월 27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