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7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김철규(金澈圭)는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한 한편 10월에는 전라좌수영 인근의 동학농민군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함. 이에 1894년 10월 22일 하동과 진주를 석권하고 있던 김인배는 관군에 밀려 순천으로 후퇴함
이후 11월 10일 김인배는 김철규에 대한 보복을 위해 전라좌수영 공격을 개시함. 동학농민군 수만명을 이끌고 여수로 진격하여 덕양역에 주둔하고 전라좌수영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관군이 전투에 대응하지 않고 날씨가 추웠던 탓에 동학농민군은 후퇴함
11월 16일 김인배는 전라좌수영에 대한 공격을 재차 감행했지만 전라좌수영의 관군의 기습 공격으로 60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덕양역으로 퇴각함
11월 26일 제3차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덕양역의 동학농민군은 전라좌수영 인근의 서문과 종고산에 주둔하였지만, 이미 전라좌수영에 상륙한 일본군 육전대와 관군의 기습 공격으로 동학농민군은 패배함
고증내용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1894년 12월 26일, 순천부 내의 동학도가 동요하고 있다는 건에 대해서는 별신 京 제108호로 신고했습니다. 다시 黑岡筑波 艦長의 통보에 따르면, 군함이 지난 19일 통영항에 정박 중(이보다 먼저 그 군함은 측량 등을 하기 위해 巨濟島로 갔음), 그곳 삼도통제사로부터 동학도가 좌수영을 포위하여 정세가 매우 급박하니 우리 군대가 후원해 달라는 照會가 왔습니다. 그 청을 받아들여 좌수영 부근으로 가서 우리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지난 22일 좌수영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는 순천부 관내 덕양리에서 동학도를 격퇴시켰습니다. 적의 시체 2구, 대포 2문, 기타 깃발과 서류 등을 버리고 도주했고 우리 군의 사상은 없으며 적의 포로가 1명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