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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여수 전라좌수영 동학농민군 전투지 (여수시 동문로)
  • 지 역
  • 전남
  • 주 소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472 일대(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로 11)
  • 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사적) 
  • 분 류
  • 전투지
  • 정 의
  • 김인배 등 동학농민군과 전라좌수영 관군 사이의 전투지
관련 역사적 사실
전라좌수영에 대한 동학농민군의 최초 공격은 1894년 9월 윤경삼, 박군하, 황종래가 이끈 순천·여수 일대의 동학농민군이었음. 그러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전라좌수영에서는 인근의 동학농민군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게 됨
1894년 10월 22일 하동과 진주에서 순천으로 후퇴한 김인배의 동학농민군은 전라좌수사 김철규에 대한 보복을 위해 전라좌수영을 공격함. 1894년 11월 10일 김인배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전라좌수영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관군이 출격하지 않고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후퇴하고 맘
이어 11월 16일 저녁 전라좌수영 인근 종고산에 주둔했던 동학농민군은 좌수영의 관군이 기습공격에 밀려 덕양역까지 퇴각함
이후 김철규는 일본군과 관군에 구원요청을 하게 되고, 일본군은 전라좌수영에 육전대를 상륙시켜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대비함. 결국 1894년 11월 26일 종고산에 있던 동학농민군을 기습공격한 일본군과 관군은 승리하게 되고 이때 전사한 동학농민군의 목을 전라좌수영 남문에 효수하여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겁을 주게 됨
고증내용
「계초존안」: 1894년 10월 28일, 아뢰기를, “계하된 전라 좌수사(全羅 左水使) 김철규(金澈圭)의 장본을 지금 보니, ‘비도들이 날뛰고 있어 이들을 토벌하려고 하나, 수영(水營)에 비축된 양곡이 없어 군량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부근 고을의 각종 명목의 쌀 가운데 1천 석에 한하여 떼내어 지급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전라좌수영은 호남의 요충에 위치하여 그 방어를 하루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광양(光陽)의 옛 둔전(屯田)의 곡식 가운데서 재량껏 가져다 군수에 보태어 쓰고 나중에 보고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찰이전존안」: 1894년 11월 26일, 매영(梅營, 전라좌수영)에서 정부에 전보하기를, “군량은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은 오지 않고 동도가 와서 포위하여 위태로움이 조석 간에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일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신속하게 동도를 토벌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매곤(梅梱, 전라좌수사)의 막하(幕下)에 있는 김학규(金學圭)가 28일에 영에서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해서 대신 전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9일, 본 군의 동면(東面)에 사는 이수희(李守喜)도 역시 거괴로 김인배(金仁培)에게 붙좇은 자로 순천(順天)에 주둔하였고 다시 좌수영(左水營)을 침범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달 25일에 본 군으로부터 경내로 잡아들여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킨 사정을 연달아 급히 보고합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9일, 본 읍 낙안 동면의 동도 이수희란 놈은 애초 유봉만(劉奉萬)의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로 10월 모일에 순천으로부터 넘어와서 못된 짓을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본 읍의 백성을 시켜 체포하여 죽일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가란 놈이 먼저 기미를 알아채고 순천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김인배에게 붙어 동적(東賊)이 다시 좌수영을 침범할 때에 중군으로 따라간 자입니다. 이달 25일 술시 경에 남상 쌍전(雙田) 앞길에서 이놈을 잡아서 당일 진시에 군민을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킨 후에 벤 목을 좌수영에 갖다 바쳤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9일, 동도의 거괴로 보성에 사는 안규복은 혹 돈녕(敦寧)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호좌도접주(湖左都接主)라고 칭하기도하고 혹은 집강으로 칭하기도 하였는데 협박에 못이겨 따르는 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근처의 읍에서 크게 말썽을 부린 자입니다. 그래서 본읍의 수성군은 서면(西面)의 백성들과 함께 22일 유시 경에 외면(外面) 돌이치(突伊峙)에서 뒤좇아 붙잡아서 당일 미시에 군민을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킨 후에 벤 목을 좌수영으로 가져다 바쳤습니다.
「갑오군정실기」 권9: 1894년 12월 28일, 전라좌수사 김철규가 장계를 올림. 광양과 순천의 동학배들이 무기를 빼앗고 관장(官長)을 내쫓은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이들 두 읍은 신의 감영에서 관할하고 있는 속읍(屬邑)입니다. 이른바 읍속(邑屬)이라고 하는 자들이 동도(東徒)에 들어가서 민읍(民邑)이 문드러지게 되었습니다. 귀화하여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라는 뜻으로 여러 차례 관문으로 신칙지시하였지만 끝내 귀화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비류와 부화뇌동하여 모의를 꾸며 이 달 20일에 5천여 명의 저들 비류가 깃발을 들고 뿔피리를 불고 서문 밖으로 쳐들어가 방화를 하면서 크게 나아가 장차 성이 함락될 염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사토병(土兵)들을 동원하여 경계를 잘 하라고 엄중히 감독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저 비도들은 종고산에 개미처럼 진을 치고 벌처럼 모여서 깃발을 펄럭이며 포를 쏘며 소리를 지르고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흉악했습니다. 동문 밖에 불을 질러 모두 다 타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특별히 지시하여 포를 쏘고 활과 돌을 어지럽게 쏘아대니 죽은 적도가 1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머리가 잘린 것들이 13급이나 되어 성두(城頭)에 매달았습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1894년 12월 26일, “本艦이 慶尙道 固城縣 밑에 있는 統營港에 정박하고 있을 때인 이달 19일, 三道 討征使가 左水營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節度使는 全羅道 左水營이 동학도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됨에 원조에 나서달라고 간절히 간청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22일 본함에서는 陸戰隊를 연안에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곳은 順天府의 관할로 좌수영의 북쪽과는 30리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적과 싸움이 벌어져 그들을 추격하자 그들은 시체 2구, 대포 2대, 말 4필, 기타 軍旗 및 창 등을 버리고 파도처럼 도주를 하였습니다. 이때 우리는 적군 1명을 생포하였고 우리 병사는 하나도 사상자가 없었습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1894년 12월 26일, 동학도가 左水營을 포위하여 정세가 매우 급박하니 우리 군대가 후원해 달라는 照會가 왔습니다. 그 청을 받아들여 좌수영 부근으로 가서 우리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지난 22일 좌수영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는 순천부 관내 德陽里에서 동학도를 격퇴시켰습니다. 적의 시체 2구, 대포 2문, 기타 깃발과 서류 등을 버리고 도주했고 우리 군의 사상은 없으며 적의 포로가 1명 있었다고 합니다. 좌수영의 여러 관민은 오로지 우리 군함이 그곳에 머물러 있어 줄 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 어민이 17명쯤 그곳에 체재하고 있으므로, 우리 군함을 잠시 그곳에 체류시켰다가 回航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첨가해서 본건에 대한 통제사의 조회문인 좌수영 인민들의 請願書 사본 別紙 甲·乙·丙을 참고하시기를 바라며 보냅니다.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김계유 1988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94
이종범 외 2000
이이화 2004
여수항일운동사편찬위원회 2006
사진(4)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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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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