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전라좌수영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은 영호대도소의 김인배가 하동과 진주에서 후퇴한 이후인 1894년 10월부터임. 이 무렵 전라좌수영의 김철규는 인근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체포하여 처형함
이에 순천으로 후퇴한 김인배는 김철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수차례 전라좌수영에 대한 공격을 전개함. 1차 공격은 1894년 11월 10일로 동학농민군 수만명을 이끌고 덕양역에 진을 치고 전라좌수영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실패로 돌아감
이후 11월 16일 재차 전라좌수영으로 공격했지만 좌수영 관군의 기습공격으로 6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덕양역으로 후퇴함. 3차 공격은 11월 26일 이루어졌지만, 전라좌수영에 이미 일본군 육전대가 상륙해 있었음
덕양역에 주둔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전라좌수영 공격을 공격하기 위해 전라좌수영 서문과 종고산 일대에 진을 펼쳤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공격으로 동학농민군은 패배하여 후퇴함
이때 체포된 동학농민군은 좌수영 남문에서 처형됨. 영호도집강 이우회, 권병택 등도 이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확인됨
고증내용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23일, 이 달 4일에 동도 1,000여명이 본 현의 동북쪽 2개 산을 점거하고 성안의 형세를 엿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수성소(守城所)에서 서쪽과 북쪽 문을 굳게 닫아 남문만 열고 포병(砲兵)을 인솔하여 부대를 만들어서 바로 산 아래에 이르러 군사를 나눠 성채를 짓고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눈치를 채고 달아나 본 현의 유둔(油屯) 등지로 돌아가서 그대로 해산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성중군 신충구가 아전과 병사를 깊숙한 땅으로 보내 뒤를 밟아 탐문을 했습니다. 비도의 당우(黨羽, 주동자) 오준언(吳俊彦), 임태인(林泰仁), 여당(餘黨) 박몽용(朴夢用), 이기순(李基淳), 명사홍(明士洪), 노경칠(盧敬七), 김양두(金良斗), 사인석(史仁石) 등은 전에 이미 차례대로 체포하였고, 거괴 유봉만(劉奉滿)과 여당(餘黨) 이칠선(李七善)은 포군(砲軍) 정재홍(鄭在洪)이 중군의 패칙(牌飭, 패록에 적은 지시)을 가지고 가서 팔영산(八影山)에서 잡아 직접 군중(軍中)에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 달 11일에 중군(中軍)이 장시에서 자리를 열어 크게 군민(軍民)을 모아 위의 10명을 모두 쏘아 죽인 뒤에 거괴 유봉만과 당우 오준언, 임태희 등 3명의 머리를 좌수영문에 바로 바쳤습니다. 비도 김자명(金子明)도 뒤를 밟아 잡아 죽였기 때문에, 그 형편을 수성중군이 각각 영문(營門)과 순무대장 순무선봉소(巡撫先鋒所, 이두황 우선봉진)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순무선봉사또님의 행차가 오른쪽 연로등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미리 이 일을 오른쪽 연로에 보냈습니다.
「순천부포착동도성명성책」: 1894년 12월, 이우회(李友會) : 수영(전라좌수영) 진중에서 11일 효수(梟首), 성찰(省察) 권병택(權炳宅) 수영(전라좌수영) 진중에서 12일 포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