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강릉관아에는 고려시대 목조건물로 객사 정문인 ‘임영관 삼문’이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고, 수 령 7사를 담당하던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이 조선시대 건물로 남아 있다. 나머지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것을 근래 복원한 것이다.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이 며칠 동안 점령하면서 삼정의 폐막을 고치고 보국안민 하려 했다는 역사를 알려주는 표지는 없다.
고증내용
1894년 9월 들어 영월.평창.정선 등 5개읍의 농민군 수천명이 대관령을 넘어 구산역에서 하룻밤을 자고 9월 4일 오전 천여명이 넘는 농민군 본대가 강릉부 관아를 점거하였다. 9월 5일 농민군은 강릉부 관아 동문에 “삼정의 폐막을 고치고 보국안민한다”는 방문을 내걸었다. 요호라 불리는 부자들을 잡아 들여 토지와 재산.전답 문서를 빼앗고, 수탈을 일삼던 이서배들을 잡아 족 치고, 민간의 송사를 처리하였다. 9월 6일 농민들은 영동일대의 최대 지주였던 이회원의 선교장 을 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서배들과 읍리들은 야습할 계획을 세우고 이회원에게 알렸다. 이회원 은 백미 100말과 돈 300꾸러미를 농민군에게 보내는 한편 야습에 동조할 계획을 세웠다. 9월 7일 비가 쏟아지는 늦은 저녁 방심하고 있던 농민군은 반농민군의 습격을 받아 20명이 목숨을 잃고, 총 7자루 창 157자루, 말 3필을 빼앗긴 채 대관령을 넘어 평창 쪽으로 퇴각하였다. <동비토론> <임영토비소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