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전라도 금구 출신의 김인배(金仁培)는 1894년 6월 말에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순천에 들어와 영호도회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 활동을 실시함. 이후 김인배와 영호수접주였던 유하덕은 1894년 8월에는 조세를 거둘 정도로 순천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음
이들은 흥양과 순천 곤양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9월 1일에는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공격하기도 했음. 그리고 9월 3일 하동부 관아에 도소를 설치하기도 함. 이어 진주지역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손은석과 남해의 여창협과 함께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며, 9월 18일에는 진주에 대도소를 설치한 바 있음
그러나 1894년 10월 22일 남부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해온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패전을 거듭했고, 결국 김인배와 유하덕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순천으로 퇴각하게 됨
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제7: 1895년 1월 13일, 이어서 30리를 행군하여 순천부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여 머물렀습니다. 이 순천부는 호남 좌도 바닷가의 큰 고을로서, 작년 6월 이후로 금구의 적괴 김인배 무리가 각처의 비도를 이끌고 10 만의 무리를 지어 성안에 들어앉아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무기를 약탈하고 사람들의 돈과 재물을 빼앗고 감히 군수품이라 일컬으며 돈을 배정하고 곡식을 걷는 일을 제멋대로 하였습니다. 아전은 숨고 백성들은 흩어져 읍 전체가 지탱하기 어려웠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지난 12월 초 6일 아전과 백성들이 의기를 떨치고 일어나 출격하여 도집강·접주·접사·성찰(省察)·괴수 등과 나머지 추악한 무리 몇 백 명을 일망타진하여 지금 보는 대로 온 경내가 편안해졌습니다.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10일, 어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경에 관아의 양반 3명과 하속(下屬)이 모두 나와, 성내의 민인(民人)으로서 영호(嶺湖, 김인배가 지휘하던 영호대도소)의 도집강(都執綱)이라고 하는 정우형(鄭虞炯)과 접주(接主)라고 하는 놈으로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문가(文哥) 및 전미도총(錢米都摠)이라고 하는 양철교(梁喆敎), 선봉(先鋒)이라고 불리는 진주(晋州)의 양가(梁哥)와 그들을 따르는 150명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성의 수비를 엄중히 지시하고 도망간 나머지 무리를 엄중히 뒤를 밟아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라고 불리는 금구(金溝)의 김인배(金仁培)가 순천부에서 도망하여 광양현에 숨었는데, 해당 현에서 김인배와 그를 따르던 2놈을 잡아서 베어 죽였다는 공형(公兄)의 문장(文狀)이 지금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급(首級, 머리)을 바치고 나머지 무리를 더욱 기찰(譏察)하여 잡도록 해당 현의 공형에게 특별히 지시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에 대해 답신하기를, “해당 현의 백성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고, 광양의 백성이 거괴를 잡아 죽인 것은 이런 때에 드문 일이다. 매우 가상하다. 더욱 힘써서 도망간 나머지 무리를 일일이 잡아서 목을 베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