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목사였던 민종렬은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해 수성군을 조직하였음. 수성군의 주요 간부는 나주지역의 향리 출신들이었음. 이들은 수성군의 중임을 맡았고 군 재정을 지원하기도 함
1894년 7월 최경선과 오권선은 나주성 공략을 위해 병력 1만 여 명을 이끌고 나주성 서문을 공격함. 그러나 나주 수성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나주성 점령은 실패로 돌아감
전봉준은 이후 최경선에게 나주성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고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나주와 금구 수령의 파직을 요구함. 그 결과 1894년 7월 18일 나주목사 민종렬과 나주영장 이원우는 파직됨. 그리고 동학농민군에 대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른 금구현감 김명수도 파직됨
그러나 민종렬은 나주목사 후임자의 부임을 막으면서까지 수성군을 조직하여 나주지역 동학농민군과 대치함. 이에 전봉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94년 8월 13일 김학진의 서찰을 가지고 민종렬과 담판을 지으려 함
전봉준은 무장을 하지 않고 부하 10여 명과 나주성 서문에 가서 민종렬과 면담을 요청함. 그리하여 전봉준과 민종렬은 나주목사 내아에서 회담을 시작하였고, 전봉준은 나주 수성군 해산을 요구했지만 민종렬이 거절하면서 회담은 결렬됨
고증내용
「난파유고」 권3 부록: 갑오토평일기. 동괴(東魁) 전봉준(全奉準)이 연달아 흥덕(興德)·고창(高敞)·장성(長城)·무장(茂長)·영암(靈岩) 등의 군들을 함락시켰다. 함평읍(咸平邑)에 근거하여 마치 유린하고 몰아가는 것처럼 나주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나주의 공형(公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글의 뜻이 매우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이때 지담(芝潭) 민종렬(閔種烈) 공이 본주(本州, 나주)에 부임하여 연좌(椽佐, 아전)와 군교(軍校)를 불러 눈물을 닦으며 말하기를,“적의 위급함이 이와 같아 금성(錦城, 나주)을 잃어버린다면, 강회(江淮)의 보루와 장벽은 영원히 의지할 곳이 없어 조정을 욕되게 할 것이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고, 죽기를 맹서하고 함께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마침내 전적(全賊, 전봉준)이 보낸 편지의 뒤에 “명분 없는 거사로 법을 어그러뜨린 것은 죽여야 마땅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은 듣고 싶지 않다”라는 16자를 써서 적의 진영에 돌려보냈다. 적이 편지를 받고 간담이 서늘해져 마침 밥을 먹다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감히 주(州)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고 이 날 밤에 함평진(咸平津) 산장(山場)으로 진영을 옮기고 다음날에 장성으로 향하여 월평(月坪)에 이르렀다.
「금성정의록」 갑편: 고종 30년 1893년 12월. 성을 수비하는 장졸들이 가서 목을 베어 올 것을 청하자 민공(閔公, 민종렬)이 막으면서 말하기를 “병졸 하나를 죽여서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단지 그 글의 뒷면에 “명분 없는 군사는 법에 의거하여 마땅히 죽여야 하며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無名之兵, 在法當戮, 不道之言, 非所願聞]”라고 써서 물리쳤다. 거괴(渠魁 )전봉준(全琫準)이 막 식사를 하려다가 이 열 여섯 글자를 보고는 수저를 떨어뜨리고 정신이 나가 다시 말을 몰아 장성(長城)에 이르렀다가 경군(京軍)의 한 부대를 만나 크게 싸웠다.
「전봉준 공초」: 8월 그믐 사이에 순상(巡相)의 영(令)를 가지고 나주로 가서 민보군(民堡軍)을 해산(解散)하라고 권고한 뒤 돌아오는 길에 장성(長城) 땅에 이르러 비로소 서로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