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7월 5일 최경선의 광주 동학농민군과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동학농민군이 이미 나주성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함. 이후 10월 15일에도 점령을 위해 동학농민군은 공격을 시도했지만 나주 관군에 패배하여 광주로 후퇴하기에 이름
1894년 11월 23일 광주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손화중과 최경선,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지역 동학농민군이 합세하여 나주 공격에 나서게 됨. 나주성 공략을 위해 나주성 북문에 위치한 함박산(咸朴山)에 동학농민군은 주둔함
함박산에 주둔한 동학농민군은 추위로 남산촌으로 후퇴하였고, 다음날인 11월 24일 나주 관군은 남산촌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함. 11월 27일까지 전투는 이어졌고, 손화중 휘하의 동학농민군은 12월 1일 해체되었고, 광주를 떠나게 됨
고증내용
「금성정의록」 갑편: 11월 23일, 적의 무리 수만 명이 금안면(金安面)에 있는 남산촌의 태평정 등지에 나아가 주둔하고, 읍과 10리 떨어진 거리에 가까이 와서 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이날 밤 북문 밖 함박산(咸朴山)에 바싹 접근했다. 민공(민종렬)은 영장(營將) 이원우(李源佑)와 함께 북문 옹성막(瓮城幕)에 올라 이졸(吏卒)을 위로하며 돌아다녔다. 이날 밤은 추위가 심했다. 금산 의막(義幕)에서는 불을 붙여 점군(點軍)하였는데 홀연히 바람이 일어 불길이 막소(幕所)로 번져나가 폭죽(爆竹)소리가 나니 마치 대포를 연달아 쏘는 듯했다. 또 동문 밖에는 귀화(鬼火)가 별처럼 늘어서서 마치 화승(火繩) 모양으로 번쩍거렸다. 적은 관군이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들고 포를 발사한다고 의심하였다. 동문 밖에 복병이 또 이르니 적이 드디어 놀라 달아나 남산촌 부근 땅에 물러나 주둔했으니 흡사 또한 신령의 도움이 있어 그런 것 같았다. 다시 산막(山幕)을 묶으니 경현촌(景賢村)의 백성들이 힘을 모았다. 소를 잡아 다시 금성산에서 신령에게 고하였다.
「난파유고」 권3 부록: 갑오토평일기, 11월 23일에 수만 명의 적들이 금안면 남산촌에 주둔하였는데, 읍과의 거리가 10리 정도로 가까웠다. 성을 도륙하려 한다는 소리가 나왔고, 이날 밤에 저들이 기습하려고 북문(北門) 밖의 함박산(咸朴山)에 올라갔다. 계책을 세우려고 멀리 동천(東川)가를 바라보니 도깨비불이 별처럼 늘어서서 마치 화승(火繩)모양처럼 보였다. 적이 놀라 달아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