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전주화약 체결 후 손화중과 최경선은 광주지역을 담당하고 있었음. 1894년 7월 광주와 나주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점령을 계획하고 있었음
1894년 7월 1일 최경선은 동학농민군 5천 여명을, 나주대접주 오권선은 나주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7월 2일 합류하게 됨. 이들은 나주성 북쪽의 금성산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7월 5일 저녁 무렵 나주성 점령을 위해 서성문을 먼저 공격하게 됨
그러나 이 전투는 나주목사 민종렬과 호장(戶長) 정태완이 이끄는 관군의 저항에 부딪혀 나주성 점령에 실패하게 됨. 이후 손화중과 최경선의 동학농민군과 오권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재차 나주성 공략을 위해 공격하였지만 관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함
이후 나주성의 관군은 후에 전라도 서남부 지역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
고증내용
「금성정의록」 갑편: 1894년 7월 초, 적괴(賊魁) 최경선이 무리 수천을 이끌고 유린하여 멀리 몰아와 곧장 본주(本州)를 공격하였다. 오권선이 창귀(倀鬼)가 되어 그 무리를 이끌고 금안동에서 합진(合陣)하고 수삼 일을 침략하고는 금성산(錦城山)에 개미처럼 주둔하였다.
「금성정의록」 갑편: 1894년 7월 초 5일, 어둘 무렵에 산꼭대기에서 일제히 내려와 곧장 서쪽 성문에 접근하였다. 민공이 급히 명령을 내리기를 “적이 우리 서문에 와 있다. 대적은 내가 마땅히 스스로 맡을 것이다. 오직 너희 북쪽, 동쪽, 남쪽 3문의 별장은 각기 엄하게 막고, 놀라지도 말고, 이탈하지도 말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라. 이 적이 성동격서(聲東擊西)나 도남의북(圖南意北) 하지 않을 지를 어찌 알겠는가. 더욱 경계를 엄히 하고 흉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끝내 마땅히 문에 임하여 너를 상주리라”고 하였다. 드디어 칼을 어루만지며 서성루(西城樓)에 올라 좌정(坐定)하였다.…(중략)…성 위의 각 초소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너 최경선과 오권선 두 적괴는 빨리 수급(首級)을 바쳐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