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나주의 접주 나동환(羅東煥, 1849~1937)은 본관이 나주이며 영암 택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도경(道卿), 호는 일암(日庵)으며,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1월에는 교단으로부터 교수 겸 교장 직책을 받았다. 농민군의 1차 기포 때는 나주의 접주로서 활동하였다.
농민군이 나주성을 공격할 때도 5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전봉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그의 부인 진주정씨와 함께 함평군 월야면 연암리 다라실에 있는 나동환의 처가로 은신했다. 관군이 들이닥쳤으나, 부인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남편과 아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고, 자신은 관군들에게 잡혀 압슬형(壓膝刑)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남편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다가 사망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의열각(義烈閣) 안에 〈나주나공동환의적비(羅州羅公東煥義蹟碑)〉와 〈효열부진주정씨행적비(孝烈婦晋州鄭氏行蹟碑)〉가 함께 세워졌다.
고증내용
「금성정의록」: 1894년 7월초, 초하루. 적괴 최경선이 무리 수천을 이끌고 유린하여 멀리 몰아와 곧장 본주(本州)를 공격하였다. 오권선이 창귀(倀鬼)가 되어 그 무리를 이끌고 금안동(錦城山)에서 합진(合陣)하고 수삼 일을 침략하고는 금성산에 개미처럼 주둔하였다.
「각진장졸성책」: 1894년 12월 29일. 당일 오시(午時) 무렵 양측이 접전(접전)했을 때 아군과 서로 인접한 지역은 금성산(錦城山), 삽치(揷峙), 민치(民峙) 등 세 곳이었습니다. 쳐들어와서 아군과 충돌한 적들은 또한 수만을 헤아렸고, 대적하여 죽이기를 다섯 낮, 밤 동안 하였습니다. 제24일 사시(巳時) 무렵에 이르러 적을 막지 못하고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적들의 기세는 거센 물결과 같아서 도저히 멈출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