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첫 봉기 용구동 항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비에는 1894년 10월 하순 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의 격전지였음을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당초 창평현 장북면 용구동 용흥암자에 숨어갔던 동학농민군 1백여 명은 쪽재골을 넘어 용구동에 포진하고 병력증강과 식량공급을 위해 용구동 일대의 각 마을에 내려와 보급 중, 일본 경찰과 군인이 대거 출동하여 마을을 포위, 2일간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곳이다. 이어서 궁산리, 대방리, 삼인동까지 확대되어 싸움은 10여일 간 계속되어 농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담양 용구동접은 드세기로 유명한 농민군이었다. 「순무선봉진등록」 등에 의하면 호남소모관과 담양도호부사가 담양지역 농민군들이 용구동(龍龜洞)과 대곡(大谷)에 군량미 80석을 저장해 둔 것을 농민군 진압과정에서 발견하였다. 담양부사는 이 군량미를 담양과 순창 두 읍의 의병소에 각기 40석씩 나누어 보냈다. 보고 날짜는 12월 11일이었다. 또 같은 날 담양부사는 담양에서 놓쳤던 농민군 가운데 용구동의 우두머리 김형순(金亨順)·김문화(金文化)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창평(昌平) 용구산(龍龜山)에 은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담양부의 수성군을 출동하여 연일 용구산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용구산이 클 뿐만 아니라 여러 봉우리가 깊숙하고 수목이 빽빽하여 우두머리들이 백양사(白羊寺) 등지로 도주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런 자료들로 미루어 볼 때 위의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기념비에 용구동 전투가 10월말 경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부분은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과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진이 담양에 들어온 것은 12월 3일이었고, 담양 농민군에 대한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된 것도 12월 3일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