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고흥(동학농민혁명 당시 흥양)에 동학이 전파된 시기는 1890년 무렵으로 알려짐. 고흥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는 송년섭으로 1890년 입도하여 보은집회에도 참가함
1차 기포 후 집강소 시기 고흥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오하기문」에는 고흥 접주로 유복만이 있었음이 확인됨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진 이후 고흥도 1894년 말까지 10여 차례의 공격을 받기도 함. 이 때문에 고흥수령은 공석이었으며, 8월 무렵부터 관군을 규합하여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대비함
1894년 12월 초에 유복만이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모아 흥양성 공격을 시도하였다가 관군에 의해 실패하였고 이 때를 기점으로 관군의 동학농민군 체포가 실시됨
일본군이 고흥에 진주하기 시작하기 이전, 즉 12월 28일 이전에 고흥의 관군은 유복만과 오준언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27명을 체포하여 처형함
고증내용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19일. 흥양(현 고흥) 수성중군(守城中軍)의 보고에, “비류가 여러 달 동안 굽히지 아니하고 주(州)와 군(郡)을 부수고 백성과 아전을 해쳤으니, 진실로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들이 잡아 죽일 자들입니다. 본 현은 땅이 비록 외졌으나 풍속이 본래 순박하고 근실하였습니다.…(중략)…동도의 거괴(巨魁) 유봉만(劉奉滿, 또는 福滿으로 표기)과 당우(黨羽, 추종자) 오준언(吳俊彦), 임태인(林泰仁) 및 여당(餘黨) 박몽용(朴夢用), 이기순(李基淳), 명사홍(明士洪), 노경칠(盧敬七), 김양두(金良斗), 사인석(史仁石), 이칠선(李七善) 등을 차례대로 체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날에 장시에서 법정을 열어 군민을 많이 모으고 위의 10명을 쏘아 죽인 뒤에 거괴 유봉만과 추종자 오준언, 임태인 3명의 머리를 나무상자에 각각 담아 수성집사(守城執事) 지발련(池發蓮)으로 하여금 바로 좌수영의 문에 바쳤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7: 1895년 1월 13일, 이틑날 새벽에 일본 부대는 낙안읍을 향해 갔으며, 본 부대도 뒤따라 출발하여 40리 되는 흥양읍에 도착하였습니다. 본 현은 현감이 부임하기 전에 아전과 백성 몇 사람이 수성군을 설치하여 유복만, 오준언 등 27명을 잡아 죽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