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보성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집강소 시기임. 보성지역 접주는 박태길(朴泰吉)이었으며, 이때 보성군수였던 유원규(柳遠奎)는 동학농민군에 우호적인 인물이었음. 박태길과 유원규는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일본군에 체포되었지만, 조사 후 무죄로 풀려남
1894년 10월에 들어 전라지역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공주를 향해 북상하게 되자 장흥부사 박헌양을 비롯하여 벽사역, 강진현, 강진전라병영의 병력을 동원하여 장흥·강진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려 함
이 시기 보성지역 접주는 구교철(具敎轍)로 휘하의 동학농민군 수천 명을 이끌고 1894년 11월 21일 웅치(雄峙)에서 봉기함. 이들은 장흥의 이방언(李邦彦), 이사경(李仕京), 백인명(白仁明) 등이 이끄는 장흥 동학농민군과 합류하여 회령진, 벽사역, 장흥부 관아, 강진관아, 전라병영성 등을 차례로 점령함
그러나 1894년 12월 12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하해 온 일본군과 관군과 접전이 시작되고, 12월 15일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함
고증내용
「영상일기」: 1894년 6월 초8일, 동학도가 다시 도당을 모아 태인(泰仁)에서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직까지 관아에 돌아오지 않았다. 적들이 하루 머물다가 옥과(玉果)를 향해 갔는데, 담양(潭陽)·창평(昌平)·동복(同福)·낙안(樂安)·순천(順天)·보성(寶城)을 넘어 곡성(谷城)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남원(南原)으로 진격한다고 큰소리를 치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갑오동학란」: …(전략)…박진동(朴振東)은 장성에서 문장렬(文章烈)은 능주에서 박성동(朴成東)은 광주에서 문장형(文章衡)은 보성에서 전유창(全有昌), 오중문(吳仲文)은 나주에서 양빈(梁彬), 신성(申檉)은 영광에서 임봉춘(林奉春)은 구례에서 김도일(金道一)은 해남에서 조석하(趙錫夏)는 곡성에서 오정운(吳正運)은 영광에서 송년섭(宋年燮)은 흥양에서 박낙양(朴洛陽)은 순천에서 일어나니 그 수를 계산하지 못하였다.
「동학관련판결선고서」: 제8호 판결선고서원본 박태길(朴泰吉), 전라도 보성 거주.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 피고 박태길. 나이 45세. 위에 기재된 박태길은 동학당에 들어가 지방의 안녕을 해친다는 의심을 받아 본 아문의 재판소에 잡아와서 심문을 특별히 하였더니, 피고가 지은 죄의 증거가 분명하지 아니하였다. 위의 이유로 피고 박태길을 죄가 없으니 풀어줄 것.
「동학관련판결선고서」: 제6호 판결선고서원본 유원규(柳遠奎), 경기도 안성(安城)에 거주. 시임(時任), 현임 전라도 보성군수(寶城郡守). 피고 유원규(柳遠奎). 나이 46세. 위에 기재된 유원규는 보성군수로서 임지(任地)에서 주재(駐在)하던 중에 동학당과 내통하여 지방의 안녕을 해친다는 의심을 받아 본 아문의 재판소에 잡아와서 심문을 특별히 하였더니, 피고가 관할하는 곳에서 지난해 동도(東徒)가 흉포함을 드러냈으나 제지하지 못한 사건을 분명히 자백하였다. 그러나 동도와 내통하여 함께 흉포함을 제멋대로 저지른 증거는 분명하지 아니하였다. 위의 이유로 피고 유원규를 죄가 없으니 풀어줄 것.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18일, 이 날에 대곡촌(大谷村)에서 출발하여 20리 길을 가서 불무등(拂舞嶝)에 도착하니, 본관(本官, 보성군수) 유원규(柳遠奎)가 영접하였다. 곧바로 10리를 가서 안치(雁峙)를 넘어 10리를 더 가서 보성군에 도착하니, 일본군 사관(士官) 스즈끼(鈴木) 대위가 인솔한 1중대와 좌수영(左水營)의 병사 50명이 보성군의 성안에 주둔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진영(陣營)을 합쳐서 머물렀다. 바로 북문 밖으로 나가 호장(戶長) 임양온(林樑瑥)의 집에 유숙(留宿)하였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40리 길이었다. 이 날 보성 군수 유원규의 보고에, “군수가 직접 만나 뵙고 급히 보고하려고 합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에 답신하기를, “도착하여 받았다”고 하였다. 이어서 도착한 해당 군수의 보고에, “근래에 비류가 창궐(猖獗)하여 수성군(守城軍)을 많이 보내자 사방으로 흩어져서 뒤를 밟아 체포하였습니다. 이 달 15일에 장흥의 경계인 웅치면(熊峙面)에서 문공진(文公振)을 잡았는데, 이 놈은 바로 장흥부사에게 포를 쏘는 변고를 저지른 거괴(巨魁)입니다. 바로 목을 베어 경계해야 하나, 감결(甘結)로 지시하신 뒤이기에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죄인 문공진을 형구(刑具)를 채워 가두고 그 형편을 우선 첩보합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사관함등」: 1894년 12월 10일, 대위 이시구로(石黑光正)는 휘하의 1소대와 2분대 및 교도중대(敎導中隊) 2분대를 인솔하여 오전 8시에 출발을 해서 영암을 지나 강진의 적을 토벌하라. 제1중대에서 1소대를 내어 미리 능주(綾州)와 보성(寶城)을 가서 장흥 근처를 지나 강진의 적을 공격하라.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6일, 비류를 붙잡는 일은 각별히 더욱 엄히 단속하여 모두 토벌하고 죽이는 즈음에 경군과 일본 군대가 본 고을 보성군(寶城郡)에 도착하여 몇 십명을 붙잡은 뒤에 경군은 장흥을 향해 출발하였고, 일본 군대는 아직 읍에 남아서 보성군의 수성군과 함께 힘을 합쳐 뒤좇아 체포하여 30여 명을 총살하였습니다. 그래서 보성군의 경내에는 우선은 방자하게 날뛰는 곳이 없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9일, 유명한 괴수 이방언은 이달 25일에 붙잡혀서 나주에 머물고 있는 일본 주력부대로 압송하였다고 하며, 온 경내를 뒤져서 매일 잡은 동학농민군의 수가 수십 명이 되는데 총살한다고 합니다. 성안의 불 탄 모습은 강진과 똑같습니다. 당일 신시 경에 보성군에 도착하니 성을 지키는 등의 일이 다른 지역과 현격히 달랐으며 온 군(郡)이 편안하여 경계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무사히 머물렀고 장차 흥양(興陽)등으로 향하려 합니다. 뒤를 이어 일의 상황을 차례대로 보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