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장흥일대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2월 4일 벽사역을 거쳐 5일에는 장흥부, 7일 강진현을 차례로 함락시킴. 이어 10일에는 강진의 전라병영성까지 함락시켰지만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의 지휘를 받는 나주의 관군이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강진으로 진격함
전라병영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인근 지역의 농민들이 참여하면서 그 세력이 점차 커졌으며 이들은 12월 12일 경 장흥 남문 밖과 모정 뒷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음. 그러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해온 경군(京軍) 선발대가 장흥에 입성함
1894년 12월 13일 새벽 황수옥(黃水玉)이 이끄는 30명의 통위대와 장흥에 주둔한 일본군과 1차 접전이 시작됨. 이 전투에서 2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함.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13일부터 14일까지 병력이 증가하여 장흥부를 재차 포위하게 됨
1894년 12월 15일 장흥의 동학농민군과 자울재를 넘어 온 동학농민군은 석대들을 통해 장흥부로 진격함. 일본군과 관군은 후록 주봉과 성모통이 대밭 등지에 매복했고, 민보군 수십 명은 동학농민군을 석대들로 유인하는 작업을 진행함. 그 결과 석대들로 몰려온 동학농민군과 전투가 시작됨
관군과 일본군의 신식무기 위력에 동학농민군은 큰 피해를 입고 자울재 너머로 퇴각함. 그리고 12월 17일 옥산리(玉山里)에 재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최후의 항전을 벌임. 이 전투에서도 동학농민군은 백여 명이 사살되고 20여 명이 생포되면서 장흥일대의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약화됨
석대들 전투는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 인사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음
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1일. 이달 15일 장흥읍(長興邑)에 도착하여 읍의 사정을 정탐하니 지난 초 5일 이방언(李方彦)이 비도 수만 명을 거느리고 성안을 함락하여 여염집에 불을 질러 가옥이 즐비하게 타서 성 안팎에 남아 있는 가옥의 수가 30호에 불과하며, 백성을 살륙하여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습니다.…(중략)…사졸들이 모두 충의를 떨쳐 총을 뽑아들고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자 동학농민군의 전열이 차례로 무너져서, 진격하고 싸우기를 반복하여 총을 쏘아 죽인 것이 수백 명이었습니다. 노획한 군수물건은 크고 작은 대포 4좌와 회룡총 1자루이며, 그 나머지 활·화살·탄약과 잡기류는 모두 불에 태웠습니다. 20리 되는 자오현(自吾峴)까지 추격하자 이 때 해는 서산에 걸려 있고 북풍 찬바람은 불어오고 병사들은 굶주린 기색이었습니다. 또한 하물며 남쪽을 바라보니 깊은 계곡이 구불구불 이어져있고, 대숲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잘못될 염려가 있을듯하여 즉시 본 진영으로 회군하였습니다.…(중략)…17일에 출발하여 남면 40리 지점에 있는 죽천(竹川) 장시에 도착하니 남쪽으로 큰 바다가 비껴 흐르는 것이 보이고, 산천이 험하고 가파른데 어느 비류인지 4∼5000명이 또 옥산리(玉山里)에 진을 치고 있다가 때로는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포를 마구 쏘기도 하였습니다. 저들의 소행을 살펴봄에 여전히 이렇게 날뛰니 통탄스러움을 가누지 못하여, 사졸을 독려하고 명령하여 일제히 공격하니 적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여 총에 맞아 죽은 자가 백여 명이고 생포된 자가 20여 명이었습니다. 그 중 10여 명은 타일러 풀어주고 그 나머지는 총살하였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1일. 이달 11일 나주에서 파견해 보낸 교장 황수옥의 보고 내용에, “병사 30명을 거느리고 능주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였으며, 12일 오경 쯤에 장흥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였습니다. 13일 동트기 전에 적들의 형편을 탐지하니 본부의 남문 밖에 적도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하므로 일본 병사와 본 진영의 병사 30명이 힘을 합해 진격하니 수합에 미치지 않아 적도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기는 틈을 타서 추격하여 총살한 자가 20여 명이며 나머지 무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아나서 끝내 드러난 흔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였더니 15일 오시 경에 적도 수만 명이 다시 모여 사방으로 에워쌀 때에 일본 병사와 교도소의 군대가 뜻밖에 들어와 힘을 합쳐 진군하여 200여 명을 총살하고, 나머지 무리는 전세가 다하고 힘이 다하여 끝내 도망갔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6일. 장흥에서 변을 일으킨 비류 수만 명이 이달 22일 내려온 대군에게 추격당하여 장흥부의 남면 고읍(古邑) 등의 협곡(峽谷)으로 숨었습니다. 13일 저 무리 수 만 명이 장차 대적하려고 하므로 대군이 일제히 나와 총살한 것이 수백 명이었습니다. 잔여의 무리는 흔적을 감추어 그림자도 없기 때문에 위 대군은 강진 등지로 내려갔습니다.
「선봉진정보첩」: 장흥부 공형의 문장(개국 503년 12월 24일). 삼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일은, 삼가 받자온 비밀 감결의 내용처럼 본읍에서 변란을 일으킨 비류(匪類) 수만 명은 이 달 12일에 내려온 대군(大軍)이 포를 쏘아 쫓아냈는데, 이들은 도망하여 본부 남면(南面) 고읍(古邑) 등 협곡(峽谷)에 숨었습니다. 13일에는 비류 만여 명이 장차 대적할 자세를 취하자, 대군이 일제히 나가서 수백 명을 포살(砲殺)하였고, 여당(餘黨)은 자취를 거두어 그림자도 없기 때문에 대군은 강진(康津), 해남(海南) 등지로 내려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