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0월경 장흥부사 박헌양이 벽사역, 강진, 전라병영 병력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을 개시하려 하자 이에 대응하여 장흥과 강진일대의 동학농민군도 세력을 집결하기 시작함
1894년 10월 16일 동학농민군 1,000여 명이 장흥의 사창 장터에 집결했으며, 영암 덕교(德橋)와 강진 석전(石廛) 장터에서도 집결하기 시작함. 이들은 10월 25일 장흥 대흥면에서 봉기한 이인환(李仁煥) 휘하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고, 26일에는 이방언(李邦彦), 이사경(李仕京), 백인명(白仁明) 등이 이끄는 장흥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여 회령진(會寧鎭)을 점령함
이어 1894년 12월 1일에는 보성 동학농민군이 장흥 사창으로 집결함. 여기에는 금구의 김방서, 화순의 김수근, 능주의 조종순 휘하의 동학농민군도 합세함. 이들은 12월 3일 벽사역으로 진군하여 4일 벽사역을 점령하고, 5일에는 장흥관아를, 7일에는 강진관아, 10일에는 전라병영성까지 점령함
고증내용
「육유재유고」: 박부사의 의로운 행적. 12월 1일 적이 보성(寶城) 등지로부터 다시 북면(北面) 사창(社倉)이 있는 곳에 집결하였는데, 많은 곳은 10,000여명이 되었고 적은 곳은 6,000∼7,000명이었다. 금구(金溝), 화순(和順), 능주(綾州)의 적들이 사면에서 경내를 압박하여 오니 물정(物情)이 흉흉한 정도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부사가 적들의 반역을 매우 통탄스럽게 여겨 성(城)의 방비를 더욱 엄중히 하도록 명령을 하고, 밤낮으로 순찰을 하며 군졸을 위로하는데 그 말과 뜻이 간절하여 마을의 백성과 군사들 중에 감격하여 분발해서 충성을 바치려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영회기」: 영회단(永懷壇). 적괴가 이것에 원한을 품고 몰래 흉악한 계획을 모의한 지가 오래되었다. 널리 가까운 경계의 적들을 불러모아 12월 1일에 적들이 보성에서 와서 사창(社倉) 등지에 주둔하였는데, 큰 접(接)은 10,000여 명이고 작은 접은 2,000∼3,000명이었다. 금구(金溝)의 거괴 김방서(金方瑞)와 화순(和順)의 괴수 김수근(金秀根) 및 능주(綾州)의 거괴 조종화(趙鐘化)가 모두 군사를 인솔해서 왔다. 이 때에 방언이 급속하게 군사를 일으켜서 말하기를, “나주로 향했다가 강진으로 갈 것이다”라고 했는데, 인환(仁煥) 및 교철(敎轍) 등과 오래 전에 세운 계획이었다.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18일. 강진 병영의 이문이 12월 6일에 내어 12월 8일 오후에 도착하였다. 그 이문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서병무)가 상고(相考)합니다. 비류 10,000여명이 본영(本營, 강진 병영)에서 1사(舍, 거리의 단위로 30리) 되는 장흥 땅에 집결하여 이 달 4일에 벽사역(碧沙驛, 현 장흥읍 원도리)을 불태웠습니다. 4일 새벽녘에는 장흥관아를 무너뜨리고 들어가서 부사(府使, 박헌양)를 사로잡아 머리를 무수히 때려 생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공형을 쏘아죽이고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남녀를 죽여서 그 피가 흘러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울부짖으며 달아나서 숨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각 처의 비류가 지금 본영과 40리가 되는 장흥의 사창시(社倉市)에 모여 있습니다. 장흥을 무너뜨리고 관아에 들어간 무리와 합세하여 바로 본영을 도륙할 것이라고 합니다. 본영을 잃을 근심이 급박하기가 조석(朝夕) 사이에 있습니다. 빨리 헤아리고 급히 구제하여 유린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8일. 동비 1,000여 명이 장흥(長興) 사창 등지에 모였다가 이달 초 4일 진시 경에 이르러 곧바로 벽사역(碧沙驛)으로 침입하여 관아와 여염집에 모두 불을 지르고 장흥부(長興府)로 향하였습니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흩어지고 우관(郵官)의 힘으로는 막을 계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찰방이 병영(兵營)으로 말을 달려가 대면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수 있는 방법을 사유를 갖추어 요청하였습니다.
「선봉진정보첩」: 병마절도사가 상고합니다(개국 503년 12월 초6일). 좌연초(左沿哨)의 정탐을 듣건대 ‘각처 비류 수만여 명이 바야흐로 본영에서 40리 떨어진 장흥(長興) 사창시(社倉市)에 둔을 치고는 장흥을 함락시키고 들어간 무리들과 합세하여 ‘곧장 본영을 도륙(屠戮)하겠다’고 소리친 말이 흉특(凶慝)하기 그지없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