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장흥지역 동학농민군에 대한 체포와 처형은 1894년 12월 15일 석대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이후임. 전투 직후 칠량면과 대구면 등지에서 이무주(李茂朱), 남도균(南道均), 윤세환(尹世煥)을 비롯한 농민군 132명이 체포되었고, 일본군은 농민군 45명을 체포함
이무주와 남도균은 일본군행군소로 압송되었고, 윤세환과 나머지 농민군은 체포 후 처형됨
장흥에서 체포된 동학농민군은 벽사역과 장대 터(현 장흥서초등학교)에서 처형이 이루어짐. 이곳에서는 장흥 동학농민군 외에 장흥 인근 지역의 동학농민군도 포함됨
고증내용
「駐韓日本公使館記錄」 6권: (18) 全羅左水營兵의 動作에 관한 記事(1895년 01월 25일). 같은 달 18일 보성군 방면의 동학도 거괴인 梁成佐, 許成甫, 許用範과 장흥 방면 동학도 거괴인 金寶烈, 金成漢, 鄭德鈂, 金時彥 및 具子益 등을 포박, 19일 이를 梟首하였고, 朴允之, 金達每 2명도 진영 앞에서 죽였다.
「양호우선봉일기」 4: 1895년 1월. 칠량면(七良面)과 대구면(大口面) 두 면 등지에서 거괴(巨魁) 이무주(李茂朱)·남도균(南道均), 접주(接主) 윤세환(尹世煥), 그리고 동도 132명을 잡았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일본 병사가 잡은 동도 역시 45명이 됩니다. 그 중 이무주(李茂朱)·남도균(南道均) 두 괴수는 일본군 행군소(行軍所)로 압송하여 보내었고, 그 나머지 동도와 윤세환(尹世煥) 등은 다 쏘아 죽였습니다.
「선봉진정보첩」: 강진현감이 첩보합니다(개국 503년 12월 30일). 도망갔다가 겨우 살아난 별포군(別砲軍)과 거의 죽을 고비를 겪은 민군(民軍)이 차차 돌아와 모이기 때문에 즉시 경내의 칠량면(七良面), 대구면(大口面) 등지에서 뒤쫓아 붙잡게 하여 거물급 괴수 이무주(李茂朱), 남도균(南道均)과 접주(接主) 윤세환(尹世煥) 및 동도 1백 32명을 잡았습니다. 경군과 일병(日兵)이 잡은 동도도 45명이나 되었는데, 이무주와 남도균 두 괴수는 일병의 행군소(行軍所)로 잡아 넘기고, 그 나머지 동학은 접주 윤세환과 아울러 모두 포살하였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4년 12월 28일. 그간 본 현에서 민간의 병사를 출동하여 접주인 윤세환(尹世煥)을 잡아서 즉시 총살하였으며, 교장 이무주(李茂朱), 접주 남도균(南道均)은 거괴로서 잡은 즉시 일본 병사에게 내주었습니다. 나머지 놈들은 경군·일본 병사와 힘을 합쳐 뒤좇아 체포한 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 겨우 총살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접주·접사(接士, 士는 司의 오식)로서 아직 붙잡지 못한 자는 그 숫자가 오히려 많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5년 1월 초2일. 거괴 이무주·남도균, 접주 윤세환과 동도 132명을 잡았으며, 경군과 일본 병사가 잡은 동도도 45명입니다. 이무주·남도균 두 거괴는 일본 병사의 행진소로 압송하였으며, 그 나머지 동학은 접주 윤세환과 함께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당초 날뛰던 무리의 수효와 그 간에 잡아 죽인 실제 수효와 비교하니 문득 소에서 터럭 하나를 뽑은 것과 같이 미미하여서 만약 지금 다 토벌하지 않으면 풀을 베고 뿌리를 남기는 근심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각별히 방법을 동원하여 체포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