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영월 직동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필제난(1871) 이후 강수와 함께 관의 추적을 피해 영양을 떠나 단양, 영춘, 영울 소밀원 등을 거쳐 1871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약 1년 동안 피신해 있던 곳이다.
최시형과 강시원은 1871년에 일어난 이필제의 문경작변으로 관의 지목을 피하여 태백산중을 헤매다 박용걸을 만나 그이 집으로 피신하였다. 1871년 9월 박용걸은 해월과 결의 형제를 맺고 관의 지목에 시달리던 해월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다. 해월은 박용걸의 집에서 49일 기도를 하 고 교인들을 모아 강도회를 열고 대인접물을 설법하였다. 1972년 1월 5일에는 영해교조신원운 동을 잘못 지도한 것을 뉘우치는 제례를 지냈다. 3월 25일에는 인제 출신 김연국이 동학에 입 도하였다. 박용걸은 해월과 강시원의 생계를 책임졌을 뿐 아니라, 1872년 1월 말 관의 지목을 피해 직동으로 들어온 수운 유족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박용걸 가에 피신하여 위기를 넘긴 해월은 1872년 4월 5일 수운의 득도 기념제를 봉행한 후 강수와 함께 정선 무은담 유시헌가로 옮겼다.
1996년 6월 천도교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건립하고 2006년 중수한 ‘천도교사적지’ 기념비가 있다.
고증내용
도원기서 <동학사상자료집>1, 235쪽
천도교회사초고 <동학사상자료집>1, 417-421쪽
본교역사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1, 392-397쪽
천도교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3, 229-237쪽
천도교창건사 <동학사상자료집)2, 15-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