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0월 장흥부사 박헌양은 전라병영성의 서병무 병사, 벽사역 찰방 김일원, 강진현감 민창호와 함께 장흥·강진일대의 동학농민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움
1894년 12월 3일 장흥 사창에서 출발한 동학농민군은 벽사역 인근까지 진출함. 이방언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장흥 남쪽 송정등(松亭嶝)에, 이인환과 구교철이 이끄는 농민군은 건산리 뒤 등성이에, 김방서는 벽사역 뒤뜰, 이사경은 행원리 앞벌에 주둔함
이에 놀란 벽사역 찰방 김일원은 동학농민군에 저항하지 않고 12월 3일 저녁 가족들을 이끌고 장흥으로 피신하여 그곳에 가족을 맡기고 전라병영성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함
1894년 12월 4일 동학농민군은 벽사역으로 공격을 개시했고 관군의 큰 저항없이 벽사역을 점령하게 됨. 한편 김일원은 전라병영성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병영성 방어를 위해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음을 듣게 됨
나주 초토영으로 이동하던 김일원은 나주에 있던 경군과 일본군이 강진과 장흥으로 이동하던 도중 만나게 되고 이들을 전라병영성까지 안내함
‘김일원 청사복성 불망비’는 동학농민군의 수세에 밀린 장흥을 구한 공을 기리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세운 비임. 비는 1900년 3월 건립됨
고증내용
「육유재유고」: 박부사의 의로운 행적(朴侯義蹟). 12월 4일에 적이 먼저 벽사(碧沙)에 불을 놓아 공해(公廨)와 여사(廬舍)가 모두 재가 되어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중략)…이 때에 벽사찰방(碧沙察訪) 김일원(金日遠)도 성을 지키려고 왔으나, 병영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일로 아침 일찍 성을 나갔기 때문에 화(禍)를 모면하였다. 아! 성을 지키는 방비가 견고해진 것은 성 밖의 백성이 단지 현재 성을 방어하는 엄정함을 보고 집 식구와 살림살이를 옮기고 성안으로 피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찰방의 처자(妻子)도 본 관아의 성안에 있었다.
「영회기」: 영회단(永懷壇). 12월 4일에 적이 불을 질러 벽사(碧沙)의 공해(公廨)와 민가가 타서 모두 재가 되었다.…(중략)… 벽사찰방(碧沙察訪) 김일원(金日遠)도 함께 성을 지키다가 병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 때문에 아침 일찍 성을 나갔고, 그의 처자는 성안에 머물러 두었다.
「양호우선봉일기」 3: 1894년 12월 20일. 이 날에 보성읍에서 출발하여 20리길을 가서 시목정(枾木亭)고개에 이르렀다.…(중략)…바로 15리를 가서 장흥성 동쪽의 벽사역에 이르렀는데, 역은 절반이나 타서 재가 되었다. 찰방(察訪) 김일원(金日遠)이 직접 찾아왔는데, 찰방의 16세 어린 아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 8일. 행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이 보고합니다. 동비 1,000여 명이 장흥(長興) 사창 등지에 모였다가 이달 초 4일 진시 경에 이르러 곧바로 벽사역(碧沙驛)으로 침입하여 관아와 여염집에 모두 불을 지르고 장흥부(長興府)로 향하였습니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흩어지고 우관(郵官)의 힘으로는 막을 계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찰방이 병영(兵營)으로 말을 달려가 대면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수 있는 방법을 사유를 갖추어 요청하였습니다.…(중략)…이에 찰방인 제가 이미 면대하여 여쭈었거니와 비류가 장흥성(長興城)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 부사를 핍박하니 그의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함부로 날뛰며 겁탈하고 노략질하여 역에 사는 백성들이 도망가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400여 호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순무사정보첩」: 아흔둘(1894년 12월 초 9일). 방금 도착한 벽사 찰방(碧沙察訪)의 보고에, “동도 1,000여 명이 장흥부의 사창(社倉) 등지로 모여들더니 이달 초 4일 진시 경에 이르러 여기 벽사역(碧沙驛)으로 곧장 쳐들어와 관아와 여염집을 다 불질러 태워버리고 장흥부(長興府)로 향하니 그곳에 살던 백성들은 흩어져 우관(郵官)과 같은 능력으로는 대비책이 없어서 형세상 부득이 찰방인 제가 병영으로 달려가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방책을 사유를 갖추어 대면하여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병영의 사또가 분부하기를, ‘비류들이 병영문 가까이까지 닥쳤는데 방어하는 군사를 보내기가 몹시 어려우니 지금 이런 사유를 초토영(招討營)에 가서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