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백성흠(白成欽, 1841-1918)은 장흥군 당곡(堂谷) 출신이다. 본관은 수원이며, 제주 판관을 역임한 기호(基虎)의 아들로 호는 동계(東溪)이다. 키가 컸고 얼굴은 동안이었으며, 평소에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소작료를 깎아주거나,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으면 자비를 들여 도와주는 등 남에게 베푸는 것을 즐겨했다고 한다. 진휼이 들었을 때 유사(有司)를 맡아보면서도 공정하게 진휼곡을 분배하였다. 무과 출신으로 관직은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민보군의 방수장(防守長)을 맡아 민보군의 군량을 지원하였다.
주민들이 그의 선행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전에 〈기선비〉를 세우려 하였으나, 백성흠의 만류로 중지하였다가 그의 사후 7년이 되는 해인 1924년에 이 비를 세웠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되자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하려 했으나, 그의 아들이 살려내어 마침내 자진하지 못했다고 하며, 1919년 고종이 죽자 수일동안 통곡하다가 사망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1924년 3월 마을〔古邑〕주민들이 세웠으며, 비문은 위계반(魏啓泮)이 지었다. 비문 전면에 “宣傳官白公成欽記善碑”라고 쓰여 있으며, 그옆에 그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에는 “방란금략(防亂禁掠)”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