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5월 전주성에 철수한 농민군은 각지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사에 따르면 7월경에는 병영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0월에 들어 집강소는 병영의 수성군에 밀려 해산되었으며, 병영에서는 장흥 수성군과 벽사역의 역졸들과 합세하여 관군의 규모가 3천명에 달하자 10월 19일부터 농민군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적지 않은 농민군이 집을 헐리거나 곤욕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따라 장흥·강진의 농민군은 북쪽에서 후퇴한 농민군과 합세하여 12월 4일 벽사역, 12월 5일 장흥성, 12월 7일 강진성을 함락시킨 뒤 강진 병영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농민군은 12월 9일부터 강진에서 병영 인근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병영군은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성안에서 지키려 하였다. 성 둘레에는 목책을 단단히 설치하고 방비하였다. 병영은 전라 병마절도사가 있는 곳이며 병력의 수로 보나 질로 보나 장흥·강진 수성군과는 달랐기 때문에 장흥과 강진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병영의 군사들도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져 싸울 의욕이 없었다.
12월 10일 새벽에 수천명의 농민군이 사방에서 진격하여 병영성 동쪽의 세 봉우리를 점령하고 포격을 하니 화약 냄새와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이때 성안의 백성들이 피신하여 밀려나오자 병사 서병무도 수성을 포기하고 피난민 속에 섞여 영암으로 달아났다. 오하기문에는 “서병무가 크게 놀라 소매 좁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해 가리개를 쓰고 옥로(玉鷺, 갓 머리의 옥장식)는 떼어 감추었으며 인부(印符)를 가슴에 품고 짚신 신발로 피난민과 섞여 성을 빠져나가 영암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우후 정규찬·감관(監官) 김두흡(金斗洽)·전 도정 박창현·군교 백종진·수성도감 부리 윤형은 이 장병들을 격려하며 앞장섰지만, 남은 장졸들은 사기가 떨어져 싸울 생각을 못하였다. 농민군은 10시경에 먼저 목책에 불을 질러 온통 불바다를 만들고 삼면에서 함성을 지르며 물밀듯이 공격해 들어갔다. 병사가 도망친 사실은 알게 된 영병들은 앞다투어 도망쳐 버렸다. 우후 정규찬을 비롯하여 군교 백종진, 전 도정 박창현 등이 전사하였고 감관 김두흡은 군기고를 지키다가 화약을 탈취하러 온 농민군 9명과 함께 자폭하였다. 전투는 정오 무렵 농민군이 병영성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