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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선무사가 다시 장계함 [宣撫使 再次狀啓]

어윤중이 겸임하였다.

신이 지난 달 26일 저들에게 가서 타이르고 설득한 연유는 이미 아뢴 바 있고, 같은 달 29일 청주진 영장 백남석(白南奭)과 병영 군관 조기명(趙基命)이 전보로 발송한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도착하여 신이 보은군에 있으면서 받았으며, 이 달 초 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쯤에는 신이 청주 영장 백남석과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과 병영 군관 조기명을 데리고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무리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가 반복하여 타이르고 깨우쳐 조정의 너그러운 은혜를 보여주니, 저들 중에는 매우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비로소 장계의 회답이 내려오는 것을 기다려 물러가기로 약속한바 지금 그것을 빙자하여 구실을 삼으려 하기에 신이 사리에 근거하여 꾸짖고 타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장계를 올려 보낸 후에 회답한 임금의 분부이니 의정부에서 아뢴 것보다 일의 형편이 더욱 무겁다. 열 줄이나 되는 임금의 분부에는 마음이 편안하여 매우 어질고 성스러운 덕이 있는데, 너희들이 비록 우매하더라도 어찌 감히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말을 만들어 스스로 왕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가?”라고 하니, 처음에도 5일을 기한으로 흩어지겠다고 말을 하여 신이 다시 3일을 기한으로 정하였습니다.

저 무리를 따라 온 사람들은 스스로 모인 이후 날마다 수 천 개의 계획이 마치 물이 계곡에 넘치고, 불이 언덕을 태우는 것과 같이 쏟아져 나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적과 주문을 가지고 무리를 현혹시키고, 도참설을 전파하여 세상을 속이니 마침내 재주와 기상을 믿었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랐고, 탐욕이 멋대로 행해지는 것에 대해 분개하여 백성을 위해 생명을 내놓은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바깥 오랑캐들이 우리의 이익의 원천을 빼앗는 것을 분하게 여겨 함부로 큰 소리 치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탐욕스러운 장수와 속이 검은 아전에게 학대를 당하여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던 자들도 그들을 따랐습니다. 서울과 시골에서 무단(武斷)으로 협박과 통제를 받아 스스로 보전할 수 없었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서울 밖으로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감영과 고을에 의지할 수 없어 흩어져 살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농사를 지어도 곡식을 남기지 못하고 장사를 하여도 이익을 남기지 못한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어리석고 우매하여 소문만 듣고 동학에 들어간 것을 즐겁게 여기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고, 빚을 져 독촉을 이겨내지 못하던 자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상민과 천민이 귀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그들을 따랐습니다.

온 나라에 불평의 기운이 가득한 것을 모두 모아 하나의 단체와 마을을 만들어 놓고 팔을 걷어 부치며 호언장담을 하고, 눈으로는 죽음을 단지 그냥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며, 선비의 의관과 복장을 하여 비록 무기를 지니지 않은 듯하지만 성에 깃발을 꽂고 망을 보고 살피는 것은 자못 전쟁하는 진영의 기상이 있습니다. 부서가 서로 이미 정해져 행동거지가 어긋남이 없어 글을 하는 사람이 오면 글로써 접대하고, 무술을 하는 사람이 오면 무술로써 접대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방법이 있으니,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저들의 악한 마음을 변화시켜 충성과 의리의 마음이 되게 하기 위해 많은 말과 기운을 쓰고 은혜와 믿음을 힘써 베풀어 조정이 백성을 위해 성의를 보여주는 것을 알도록 하였더니, 그 중에서 사족(士族)으로 무리에 들어와 몇몇 우두머리가 된 자는 스스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명령을 받들어 흩어지겠다고 청원하면서 “저들이 오랑캐를 물리친다고 명분을 삼은 오랑캐들이 국도에 섞여 살면서 우리의 재물의 원천을 소모시키니, 이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온 나라의 의병과 함께 힘을 합쳐 물리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이미 정부가 타협하여 상의한 것으로, 중국이 이미 출병하여 용산(龍山)에 주둔한 것은, 이를 증명할 문서가 있는데도 어찌하여 너희들은 자꾸 구별하여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가?”라고 하였고, 또 “탐관오리의 횡포는 외국과 교류한 이후 더욱 거리낌이 없고, 많은 사악한 것이 뒤섞여 밀려 들어와 백성을 박해하는 것을 일삼고 있는데, 비록 이를 징계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실상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라고 하니, 저들은 “위로 조정에 아뢰어 탐관오리를 쫓아내고자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는 조정이 해야 할 처분인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고, 또 “저희들의 이 집회는 조그마한 무기도 가지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민회(民會)입니다. 일찍이 여러 나라에도 민회가 있다고 들었고, 조정의 정령(政令)이 백성과 나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근래의 일입니다. 어찌 저희들을 도적의 무리[匪類]라고 지적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너희들이 만약 아래의 사정을 아뢸 것이 있으면 글을 작성하여 오라. 마땅히 그것을 전달해 줄 것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서울로 올라가서 서울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니, 또 말하기를 “전(前) 충청감사는 전 영장(前 營將) 윤영기(尹泳璣)와 함께 서로 협조하여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멋대로 백성의 재산을 수탈한 것이 매우 많아 집회를 열게 되었고, 여러 무리들에게 모두 흩어지라고 하여도 모두 부모와 집안에 대한 연민이 없다고 하면서, 이미 모두 토지와 재산을 매각하여 죽기를 기약하고 왔으니 지금 돌아가라고 한다면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또한 고을의 토호들이 즐겁게 맞이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여기에 있으면서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 같은 사정은 내가 마땅히 알아서 처리하겠다. 호서와 호남에는 이미 공문을 보냈고, 다른 도에도 공문을 보내 시행하겠으며, 은혜로운 임금의 분부 중에 이미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라고 하였으니, 관찰사와 수령이 된 사람들이 누가 감히 어기고 학대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스스로 이름을 말하면서 “내가 바로 서병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불행하게도 동학에 들어와서 남들에게 지목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마땅히 모이게 된 내력을 자세하게 말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호남에 모인 무리들은 겉으로 보면 비록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문을 만들어 걸어놓은 것은 모두 그들이 한 것이고, 형편이 매우 다르니, 원하건대 공께서는 자세하게 살펴 처리하고 우리 무리와 혼동하지 말고 옥석을 구별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구분하여 기록하여 올려 보냅니다. 널리 타이른 후에 비록 흩어지겠다고 했지만 3일을 기다려서야 흩어지는 형편이 되어 지금 장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무리를 모으게 된 정황은 이미 매우 헤아리기 어려워 조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무리들이 이미 많아서 자세하게 조사하여 따르게 하기는 어려우니, 다만 각각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라는 효유문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세하게 조사한 항목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전(前)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의 탐학과 불법적인 정황은 신이 아직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리들이 고발한 내용의 대강을 보면 이 동학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한 것은 바로 이 사람 때문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재앙과 환란의 근원인데, 또한 무리가 모인 초기에 군현에서 그대로 두고 즉시 보고하지 않아 거의 만연되어 어찌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미 교체되었다고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보은군수 이중익이 동학의 무리들을 모이게 한 것은 비록 지방의 정치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책임지고 설득하여 해산시키지 못했고, 또한 사정을 물은 것도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으니 경고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고을이 새롭게 동학 무리들의 소란을 겪어 공적·사적인 접촉과 판단을 생소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므로 처벌을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호남의 동학 무리들을 설득하여 흩어지게 하는 것은 한시라도 걱정이 그치지 않으므로 신은 여기에서 직접 전라도로 향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모두 보고하고 차례대로 설명 드리오니 잘 시행하시옵소서.

초 3일 묘시에 도어사가 백성의 무리들이 물러나고 흩어지는 형세로써 장계를 보낸 후에, 지금 초 3일 신시 쯤에 보은군을 출발하여 전라도 땅으로 곧바로 향하였고, 청주 영장은 초 4일 묘시에 병사를 거느리고 본진으로 돌아가 형세를 보고하였습니다.

4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보은군 장내리에 모였던 동학 무리 수 만 명이 초 2일부터 모두 흩어지고, 우두머리들이 밤을 이용하여 도주한 이유를 초 3일에 이미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흩어져 돌아간 사람들이 어느 지역으로 갔는지 몇 명이나 되는지를 각처에 있는 장리(將吏)들을 시켜 지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탐문하여 오도록 하여 그것을 베낀 후에 다시 보고합니다.

하나, 북면(北面) 구치(九峙)의 장리들이 기록하여 보고한 내용에는 이 달 초 2일 신시부터 초 3일 사시까지 동학의 무리로서 돌아간 사람은 경기 수원접(水原接) 840여 명, 용인접(龍仁接) 200여 명, 양주(楊州)와 여주(驪州) 등 지역 사람이 270여 명, 안산접(安山接) 150여 명, 송파접(松坡接) 100여 명, 이천접(利川接) 400여 명, 안성접(安城接) 300여 명, 죽산접(竹山接) 400여 명, 강원도의 원주접(原州接) 200여 명, 충청도 도내의 청안접(淸安接) 100여 명, 진천접(鎭川接) 50여 명, 청주접(淸州接) 290여 명, 목천접(木川接) 100여 명, 중간 사잇길로 원평(院坪)으로부터 충주(忠州)로 향한 사람이 1,000여 명인데, 이들이 사는 지방은 탐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 남면(南面) 원암(元巖)의 장리들이 기록하여 보고한 내용에는 이 달 초 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학의 무리들로 돌아간 사람들은 전라도 한 도에서 빠진 고을이 거의 없어 이를 합하면 5,600여 명이 됩니다. 도내에는 옥천접(沃川接)이 150여 명, 청산접(靑山接)이 30여 명, 비인접(庇仁接)이 8명, 연산접(連山接)이 13명, 진잠접(鎭岑接)이 30여 명, 공주접(公州接)이 5명, 영남의 김산(金山) 사람이 2명이라고 합니다.

하나, 동면(東面) 관리(官里)의 장리들이 기록하여 보고한 내용에는 초 2일에 돌아간 사람은 전라도에는 함평(咸平)·남원(南原)·순창(淳昌)·무산(茂山)·태인(泰仁)·영광(靈光) 등의 지역 사람이 200여 명이고, 경상도에는 성주접(星州接)이 30여 명, 선산접(善山接)이 30여 명, 상주접(尙州接)이 90여 명이고, 충청도 도내에는 옥천접이 30여 명, 영동접(永同接)이 50여 명입니다. 초 3일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돌아간 사람은 전라도에는 장수접(長水接)이 230여 명, 영암접(靈巖接)이 40여 명, 나주접(羅州接)이 70여 명, 무안접(務安接)이 80여 명, 순천접(順天接)이 50여 명이고, 영남에는 하동접(河東接)이 50여 명, 상주접이 20여 명, 선산접이 60여 명, 김산접(金山接)이 18명, 진주접(晉州接)이 60여 명, 인동접(仁同接)이 4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나, 서면(西面) 무서(畝西)의 장리들이 보고한 내용에는 옥천접이 800여 명인데, 초 2일 오후에 지나갔다고 합니다.

하나, 동면 적암(赤岩)의 장리들이 보고한 내용에는 초 2일 오후에 상주의 공성접(公城接) 소속 50여 명이 물러갔고, 금산과 선산 등의 지역 사람 100여 명과 안동접(安東接)의 40여 명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하나, 이외에 샛길로 밤을 이용하여 몰래 도주한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주석
용산(龍山)에 주둔 청국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군대를 더욱 강화해 파견하여 일본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는데, 원세개(袁世凱)가 통상사의라는 직함을 가지고 지휘하였다. 그들 주둔지는 서울 외곽에 있는 용산에 두었다.
민회(民會) 동학교도들의 평화집회를 서양의 정치집회로 보아 이 표현을 썼는데 때로는 민당(民黨)이라고도 하였다. 어윤중이 처음 이 용어를 빌어 사용하자 척화파 유림들이 비도라 지칭하지 않았다 하여 공격하였다.
원평(院坪) 원이 있는 들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 보은의 동남쪽에 있는 들판. 금구현의 금산사 입구에는 원평이 있다. 이곳에서 보은집회와 때를 같이해 대대적 집회를 가졌는데 보은 원평과 금구 원평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무산(茂山) 원문의 오자인 듯하다. 전라도에는 무산이라는 지명이 없으므로 무장(茂長)의 오기로 보인다. 당시 무장은 손화중포의 근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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