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기(時聞記) -임술년 여름에 막하로 들어간 이후부터 경험하고 들은 내용이다.
임술년(1862)
임술년의 민요(民擾)는 진주에서 시작하여 여러 고을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삼남지역이 모두 일어나 흰 두건을 이마에 두르고 장대에 헝겊을 걸어 깃발을 만들고 백명, 천명씩 모여 무리를 이루었다. 삼정(三政)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여 일제히 원통함을 호소하고 장리(長吏, 수령)를 쫓아 버리고 민가를 불태우고 인명(人命)을 밟아 죽였다. 맹렬히 뛰어다니며 꾸짖고 욕설을 하는 등 하늘의 태양이 높은 줄을 모르니, 지난 역사에 없었던 일이다. 만약 그들 가운데에 지휘를 할 수 있는 자가 몇 명 정도 있었다면 필시 예측할 수 없는 변고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된 연유는 수령의 탐욕과 지역 토호들의 무단(武斷)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환란을 견디지 못해 제아무리 하소연하더라도 신원(伸冤)할 곳이 없었으니, 차라리 한 번 죽더라도 원통한 심정을 드러내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봉기한 민중들은 마치 여러 개들이 짖는 소리와 같고 모인 무리들은 마치 파리떼가 시끄럽게 구는 것과 같았다. 저들의 세력이 매우 컸지만, 실제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묘당(廟堂)에서 선무사(宣撫使)를 나누어 보내 진정시켰다. 그런데 아래에서 일으킨 난리의 발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호남 선무사는 조상공(趙相公) -구하(龜夏)씨- 이다. 나는 그 행차를 따라가 막하에 있었기에 전말(顚末)을 보고 알았다. 며칠 사이에 42주(州)의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창궐한 세력이 난리보다도 심하였다. 일행이 누차 위급한 지경을 겪었지만, 상공의 큰 도량과 용감한 책략으로 그 우두머리를 섬멸하고 나머지 무리를 진무(撫鎭)하고서 돌아왔다. 영남과 호서 양도(兩道)의 민란 역시 모두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