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1865)
이 해에 사학(邪學)을 크게 금지하였다. 사학은 서양인의 학문이다. 우리나라의 이상한 무뢰배들이 서양 국가와 몰래 교통하여 서양인을 데리고 와서 교주(敎主)로 삼아 서로 가르치고 배운지 오래 되었다. 경향 각지에 교세가 차츰 확장되었다. 묘당(廟堂)에서는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끝까지 찾아내어 치죄하였는데, 사형을 당한 자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재신(宰臣) 남종삼(南鍾三)이 와주(窩主)로 참수를 당하였고 서양인 장경일(張敬一)이 교주로서 옥중에서 죽었고, 그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다 소탕되었다. 한양(漢陽) 도성 안에 척사비(斥邪碑)를 세워 간사한 무리들이 외국과 교섭하지 못하게 하니, 조야(朝野)가 숙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