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년(1869)
당백전은 본래 1닢을 가지고 100닢의 가치로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100닢을 가지고 10닢의 가치로 사용하자 물가가 높이 올랐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싫어하였다. 이로 인하여 혁파를 당하였다. 의론하는 자가 모두, “애석하도다. 그 혁파됨이여”라고 하였다.
당백전은 진실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보배인지라. 천고(千古) 이후까지 있어주기를 바랬건만, 수년 내에 혁파되고 말았으니, 백성의 풍습이 어리석고 완악하며 법령이 해이한 탓이겠으나 이것은 전적으로 본전은 적고 이익이 많기 때문에 혁파된 것이다. 돈을 주조하는 본전은 백분지일에 불과하지만, 그 이익은 일분지 백배가 되는지라, 이익을 탐하여 도주(盜鑄)하는 자가 쉽게 죄를 저지르는 마음이 있었고 물건을 팔아 가격을 받는 자가 경시하는 뜻이 있었다. 공사(公私)간에 주조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천해지고 매매의 가격이 높을수록 더욱 염증을 내는 것이 형세상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대개 백성이란 더불어 평상(平常)을 논할 수는 있겠지만 변화를 함께 논할 수는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단지 일정하여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기쁜일인 줄만 알고 변화해서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일정한 것이 되는 줄은 알지 못하니, 변화하는 초기에 불편하다는 여론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시행하는 초기에 믿음을 얻지 않고 법령만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옛날 상앙(商鞅)의 법은 비록 말할 필요가 없지만, 도시(都市)의 5장(丈)의 나무로 법령을 변경하여 행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만약 당백전 시행 초기 주조법을 정할 적에 본전은 10분의 8, 9이고 이익은 10분의 1, 2였다면, 비록 법을 엄중하게 행하지 않았더라도 백성은 경시하지 않고 사용하는 데에 지체되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며, 가격이 높으면 사적으로 돈을 주조하는 폐단은 금하지 않아도 절로 금해졌을 것이다. 그 후 임오년에 또다시 당오전(當伍錢)을 주조하였는데, 5전이 도리어 1전의 가치로 사용되었기때문에 수년이 되지 않아 또한 혁파를 당하였으니, 물가가 높게 올라 백성들이 싫어하는 폐해는 당백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의론하는 자가 모두, “당백전과 당오전은 운수(運數)에 따라 나온 것이다. 그 혁파를 가지고 정치의 득실을 논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경오년(1870)에서 임신년(1872)까지 경향 각지의 폐막을 힘껏 바로잡기를 다하였고 호강(豪强)한 자들이 두려워하여 소민(小民)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사학(邪學)을 배척하고 무비(武備)를 닦았으니, 국가가 부강할 희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