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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겨울 10월[冬十月]

1일 갑진

맑고 매우 온화함.

초 2일

맑음.

초 3일

맑음.

초 4일

맑음.

초 5일

맑음. 율동의 묘소에 오르고 계당에 들렸다가 평기 집의 안부를 살폈다.

초 6일

맑음. 넷째 아우가 왔다.

초 7일

조금 비가 내림. 다섯째 아우가 왔다.

초 8일

맑음. 셋째 아우가 왔다. 황간 사또 송창로(宋昌老) 숙겸(叔謙)이 왔다. 만석(萬石)이 금협에서 되돌아와 아들 성의 편지를 보았다.

초 9일

맑음.

초 10일

맑음. 새벽에 조비(祖妣, 할머니 )숙부인 김씨의 제사를 지냈다.

11일

맑음.

12일

다섯째 아우가 조카아이를 데리고 혼례길을 가다가 진잠(鎭岑)에 이르러 들렀다.

13일

맑음. 이날은 조카아이 □구(求)가 합근례(合巹禮, 부부가 되는 예식)를 행하였다.

14일

맑음. 평기 집의 안부를 살폈다.

15일

맑음. 이날 질부 조씨(趙氏)의 빙례(聘禮)를 행하였다. 백씨께서 휴가를 받아 근행(覲行)하려고 평기 집에 도착하였다.

16일

맑음. 평기 집의 안부를 살폈다.

17일

맑음.

18일

맑음. 경병(京兵) 500여 명이 보은에서 금영으로 들어갔는데 대교를 지나갔다.

19일

맑음.

20일

맑음. 아들 성이 금협에서 돌아갔다.

21일

맑음.

22일

밤에 비가 내림.

23일

맑음. 동비가 대교에 크게 침입하였다. 나는 마침 평기 집에 갔다. 저녁쯤에 동비 30∼40명이 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두르며 난입하여 넷째와 다섯째 아우를 붙잡아 결박하여 구타하고 곧바로 그들의 대장이 있는 곳에 갔다. 생사를 알 수가 없어 피를 쏟으며 기어가서 밤에 금강을 건너 아침에 충청감사를 만나보고 오후에 나왔다. 오공동 서쪽봉우리에 올라 효포(孝浦) 등지를 멀리서 보니 관군과 전주의 동비들이 진을 치고 대치하는 것을 보았다. 밤에 오공동 정주보(鄭周甫)의 집에서 묵었다. 바로 24일의 일이다.

24일

맑음. 아침에 송영순(宋榮淳) 집에서 밥을 먹고 오후에 오공동으로 나왔다. 전해 들으니,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이 300명의 경병을 거느리고 수촌(水村)에서 대교를 향하여 동비를 공격하였다. 수십 발의 총성에 불과했지만 물고기나 새처럼 놀란 동비는 일시에 해산하였다”라고 하였다. 저녁 후에 산지기 2명 편으로 편지를 보내 평기 집의 안부를 묻고 비로소 둘째 아우가 무사하게 되돌아왔음을 알았다. 이는 천행이지만 각 집안의 가산을 다 수색해서 가지고 갔다. 단지 텅 빈 집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25일

새벽에 비가 내리다가 아침 이후에 개임. 이날은 소설(小雪)이다. 아침 이후 오공동에서 장전(長田)으로 돌아와 집에 들어가 보니, 묘우(廟宇, 신주)는 효암산(孝巖山) 가운데로 옮기게 되어 아내가 모시고 가니 천만 다행이었다. 이 밖의 나머지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과 행랑채 사람이 차츰차츰 왔는데 그들을 보니 머리를 싸매고 다리를 절며 모두 상처를 입고 기침을 하였다. 학림(鶴林) 아사(雅士) 유씨(柳氏)는 특히 혹형을 당하여 스스로 눕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이는 모두 내가 밖에 있을 때 23일 밤에 동비들이 형륙(刑戮)을 제멋대로 행했기 때문이었다. 효암으로 가려 했지만 길이 막혀 이루지 못하였다. 평기 집에 가서 문안하고 그곳에서 묵었다. 노동(老洞)의 벗 이(李)와 도계(道溪)의 벗 김(金)에게 들러 만나보았다.

26일

맑음. 일찍 장전으로 돌아갔는데 효암에 가서 묘우를 살펴보았다. 아침 이후에 어은(漁隱)에 갔다가 돌아서 사산(沙山)에 나아갔다. 저물녘에 효암으로 돌아가 묵었다. 전해 들으니, “효가(孝家, 효포의 오식)에서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다가 동비들이 패배하여 경천(景天, 敬川의 오식) 등지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27일

맑음. 식사를 한 후에 장전으로 돌아가서 묘우의 궤연(几筵)을 청소하고 돌아왔다. 아들 성(性), 아우 학(學), 외제(外弟) 권씨가 모두 와서 모여 함께 묵었다. 낮에는 향당(鄕黨)의 친구들 중 와서 본 사람이 많았다.

28일

맑음. 밤에 가는 비가 내림. 율동의 묘소와 평기 집을 살피고 계당에 들렀다. 동비들이 지나간 곳을 보니 또한 우리 집과 같은 처지이기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사우(祠宇)를 한 밤중에 천봉(薦奉)하여 신주를 넣어 두는 궤를 잠시 봉안하였다. 연기(燕岐) 둔덕리(屯德里)의 종씨(從氏)가 여러 자녀들을 데리고 갔다.

29일

맑음.

주석
경병(京兵) 500여 명이 보은에서 금영으로 들어갔는데 대교를 지나갔다.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 우선봉 군사들은 공주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충청도 해안지방의 농민군 토벌에 나서 예산 홍주 등지로 진출했다.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 당시 군 지휘관에게 수령의 직함을 별도로 주고 현지 전투에 투입했다. 홍운섭을 비롯해 서산군수 성하영, 죽산부사 이두황 등이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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