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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자주 교체되는 관찰사와 여러 읍의 수령들의 탐욕이 끝이 없었는데 전운사(轉運使)가 백성을 가렴주구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그들이 있는 곳마다 성대해져 그 무리가 만(萬)이나 천(千)으로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해에 국내가 크게 혼란하였다. 봄 이후부터 동도(東徒)가 크게 성했다. 먼저 호남의 고부(古阜)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군수 조병갑(趙秉甲)이 가렴주구하여 원망을 쌓고,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전혀 없게 되어 무리들을 불러 모아 관부(官府)에 들어가 점거하고 군기(軍器)를 빼앗았다. 전봉준(全奉準, 奉은 琫의 오기)이 그 괴수가 되어 전주부를 근거지로 삼았다. 조정에서 홍계훈을 초토사로 파견하여 경병 1,000여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하지만 두렵고 겁이 나서 즉시 격멸하지 못했다. 전봉준이 홍계훈에게 귀화한다고 속이고 홍계훈 역시 동학도의 수가 많음을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당시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가 내려오자 홍계훈도 자신이 공로를 차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갑자기 전봉준이 귀화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전봉준이 서문(西門)에서 나오면서 글을 올리고 홍계훈 진지 앞에서 병장기를 파손하였다. 하지만 몰래 북문으로부터 날카로운 병장기를 싣고 나왔다. 홍계훈의 진지를 만나자마자 다시 깃발을 세우고 나팔을 불며 태연자약하게 갔다.
전라감사 김문현을 교체했는데 전봉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탈출하여 도망갔기 때문이다.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이 두려워 겁을 내어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여산(礪山)에 도착해 머문 후에 전봉준 전적이 성을 비우고 나간 뒤에야 비로소 감영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전봉준은 귀화했다고 칭하고 단신으로 들어가 감사의 일을 대신 행하였다.
순영(巡營, 전라감영)의 관문(關文)과 감결(甘結)에 반드시 전봉준의 도장을 찍은 연후에야 여러 읍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전봉준이 대죄(待罪)한 지 여러 날 동안 감히 형을 가하여 주벌을 하지 못해 양호(兩湖)의 큰 화를 양성하였다. 호서(湖西)의 경우 최명기(崔明基)·강채서(姜采西)·박화춘(朴和春)이 유성(儒城)에서 일어나 남의 무덤을 파고 남의 재화를 빼앗았다. 임기준(任基準)은 궁원에서 일어났다.

3월에 대교에 진입하여 유회(儒會)와 향약(鄕約)을 파괴하였다. 동괴(東魁) 최시형(崔時亨)이 청산(靑山)에 몰래 거주하며 포교 활동을 하였다. 금년 이후로는 전혀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 없이 동조하는 무리를 널리 포섭하니, 장각(張角)의 36방(方) 같은 것 뿐만이 아니었다. 조정에서 동비를 철저히 토벌하기 위해 청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청국병사 3,000명이 전주로 향해 갈 즈음에 일본도 병사를 출동시켜 와서 성을 허물고 도성에 침입하였다.

6월 21일 일본군이 대궐을 침입하여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협박하고 모든 제도를 바꿔 청국을 배척하면서 ‘자주(自立)’라고 칭하였다. 일본과 청국이 아산(牙山)과 성환(成歡)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청국이 패하여 달아났다. 이후부터 동비가 기회를 잡아 크게 일어나 불길이 타오르고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호서(湖西)의 동비는 감사 조병호(趙秉鎬)가 은밀히 부합하는 것을 믿었다. 만약 조정에서 동비를 체포하여 효수하는 것으로 경계하라는 명령이 있으면 먼저 기밀을 통지하여 더욱 꺼리는 바가 없고 창궐함이 날로 심하였다. 공주의 대전 등지에서 청주 관군 60명을 살해했지만, 감사 조병호는 귀화시키겠다는 말만 하고 한마디도 저들을 처치하겠다는 말이 없었다. 저들 역시 ‘감사는 우리 편의 사람이니, 누가 감히 우리를 엿보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동학의 무리가 아득히 넓고 하늘까지 이르는 형세에 이르렀다.

10월 20일 후 전봉준이 전주에서 올라와서 효포에 이르렀다. 최명기(崔鳴基)는 유성에서 들어와 대교를 점거하니 하루아침에 우리 큰집과 작은 집의 가산이 모두 탕진되었다.

24일 안성군수 홍운섭이 대교의 적을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26일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전봉준을 격파하여 패주시켰으며, 승승장구하여 추격하였다. 경군(京軍)이 남쪽으로 전주의 비적을 정벌하여 전봉준을 사로잡고 나머지 무리들을 체포하여 토벌하였다. 관동(關東)과 해서(海西) 등지에서도 계속 모두 토벌하였다.
박영효가 일본에서 돌아와 내무대신이 되었다. 전적으로 나라의 권세를 농단하여 모든 문물제도를 변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는 그 대략이고,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농사는 흉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밭은 흉년에 가깝고 논은 꽤 이득이 있었다. 하지만 가을에 추수할 때에는 비용이 매우 많아 민생의 곤궁함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주석
장각(張角)의 36방(方) 장각은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에 황건적(黃巾賊)의 우두머리로, 장각이 8주(州)에 세력을 확장하자 드디어 36방을 두었다. 큰 방은 무리가 1만여 명이고 작은 방은 6,000 또는 7,000명쯤 되었다고 한다.
조병호(趙秉鎬) 충청감사로 재직하다가 1894년 가을 박제순과 교대하고 경상감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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