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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2월

17일

입춘. 날씨가 온화하여 꽤 양춘(陽春)의 기상이 많았다.

18일

날씨가 온화하고 바람이 가볍다. 추운 날씨에 단단했던 얼음이 거의 다 녹아 사라졌다. 오후에 □□□에 가서 이성수(李聖授)[규형(圭瑩)]를 방문하려고 했는데 만나지 못하였다. 오후 늦게 본가로 돌아왔다.

19일

날이 샐 무렵 오던 눈이 아침 내내 내렸다. 오후에 햇빛이 비추니 흐림과 맑음이 교차되었다. 시중드는 사람을 □□□□□ 이씨가(李氏家)로 보냈는데 저물녘에 목동(木洞) 허씨(許氏) 누이 집에서 심부름꾼이 오니, 새해에 보내는 물품이 풍부하고 좋았다.

20일

맑음. 오후에 이성수가 와서 방문하였다. 전해 들으니, “경저(京邸) □□□□□□ 사람이 소를 타고 1월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섣달 그믐날 밤 □이 날았다”라고 하였다. 이는 필시 요괴한 사람이 무고하고 미혹해서 한 말이다. 일찍이 들어보니, 영암(靈岩) 선원사(仙源寺) □□□□□□□□ 매우 엄하여 어느 누구도 열어본 사람이 없었다. 영평(永平) 이서구(李書九)가 완백(完伯) 이었을 적에 이 절에 도착하여 돌사다리를 올라가서 열어보려고 하였지만, 바람과 번개가 크게 일어나 실행하지를 못하였다. 올해 가을에 동학의 무리들이 이 절에 이르러 100장(丈) 높이 절벽에 몸을 움츠리고 올라가서 신서(神書)를 열어보고 갔다. 영평 이서구가 보지 못한 것을 동학이 마침내 본 것은 필시 신기한 일이라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생각하고 추종하면서 오히려 남보다도 뒤쳐질까 걱정하였다. 아, 영평은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일컬어졌는데, 오히려 괴기한 서적을 보고자 하였다. 더구나 어리석은 백성들에 있어서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대체로 동학의 발단이 된 자[作俑]는 바로 최제우(崔濟愚)로, 현 임금 갑자년(1864)에 처형되었다. 그의 친족 최시형(崔時亨)이 찌꺼기들을 수습하였는데, 진실로 그 무리들이 번창하여 팔도가 온통 빠져들었다.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해 들으니, “그 무리들이 공주에 모여서 계룡산을 주문을 외우는 곳으로 삼고 특별히 건물을 짓겠다는 뜻으로 금백錦伯, 충청감사에게 청하자, 관찰사가 들어주지 않고 그 주모자를 죽였다. 하지만 그 무리가 날마다 모이고 더욱 심해져 이루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시 조정(調停)하여 저들 마음대로 동학이 되었다”고 한다.
아, 군탄(涒灘) 이후 사람과 짐승의 자취가 나라에 뒤섞이고 윤리와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 오직 한 조각 우리 동방만이 주(周)나라 예법을 삼가해서 지켜내어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학문이 찬란히 홀로 밝혀졌는데 세상의 도의가 쇠퇴해지고 사특한 학설이 횡행하여, 사람들이 각자 이를 배워 오랑캐의 지경에 점점 들어가니 한번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였다. 비록 이단을 물리칠 수 있을지라도, 오호라, 애통하도다!

21일

맑음.

22일

맑음.

23일

맑음.

24일

맑음. 오후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25일

맑음. 북풍이 가장 세차게 불어 거의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아갈 정도였다. 하천물이 단단히 얼었다.

26일

맑음. 바람의 세기가 전날보다 더 세찼다가 조금 누그러졌다. 근자의 추위는 겨울 중 제일 심하였다.

27일

맑음.

28일

날씨가 화창하고 바람도 가벼워 추위가 조금 누그러졌다.

29일

날씨가 꽤 온화하였다.

30일

아침 내내 흐렸다가 아침 이후에는 햇빛이 비추었지만 흙 안개가 희미하게 퍼져있고 저녁 내내 구름기운이 자욱하게 어두웠다.

주석
선원사(仙源寺) 선운사(禪雲寺)의 오기이다. 전라남도 고창의 선운사에 있는 도솔암의 마애불 비기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손화중이 도솔암 마애불의 비기를 꺼내어 동학군이 미륵불과 같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들로 소문이 났다”고 하였다.
이서구(李書九) 전라감사로 있던 이서구가 도솔암 바위에 새겨진 미륵불의 배꼽에 비결이 있다고 하여 꺼내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호남가를 지어 호남의 지형과 운수를 노래했다고도 한다.
[作俑] 좋지 않은 일을 시작한 자에 대하여 쓰는 말이다.
군탄(涒灘) 군탄은 고갑자(古甲子)로 신(申)에 해당, 곧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을 말한다. 척사위정파들은 개화파와 일본을 짐승의 무리라 매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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