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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4월[四月]

초1일

맑음.

초2일

조금 비가 내림. 옥과(玉果) 고모부 정씨[계원(桂源)] 어른이 왕림하셨다.

초3일

쾌청. 아침 이후 정씨 어른께서 떠나셨다.

초4일

맑음. 성수와 함께 산재에서 글을 읽었다.

초5일

맑음.

초6일

맑음. 고개 위에 서재(書齋)의 제생들이 봄을 전별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나에게 권유하여 봉우리를 오르고 시냇가에 임하면서 노닐다가 저물녁에 돌아왔다.

초7일

망전(望田) 서병오(徐秉五) 어른께서 왕림하였다. 밤에 비가 내렸다

초8일

비가 내렸다.

초9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당시 조선 팔도 여러 고을에서 민란을 선동하는 자가 열 서넛이었는데, 그 무리는 모두 동학이었다.
본도의 동적들이 고부 두승산(頭僧山)에 모였다. 전라감사가 비장(裨將) 이모(李某, 이경호)를 보내, 군사 수백 명과 열읍의 속오군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산 아래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는데 밤에 적이 세 산봉우리에 불을 피워 경계하였다. 얼마 뒤에 적들이 두 봉우리의 불을 끄고 중간 봉우리 하나에서만 불을 피워 남겨 두었다. 관군이 마침내 적이 잠을 잔다고 여겨 한밤중에 군사를 출동시켜 두 봉우리 아래에 이르렀지만, 사방이 고요할 뿐이었다. 그런데 적병이 두 봉우리 아래에서 나와 관군의 후미를 끊고 중간 봉우리의 적들이 관군의 앞부분을 공격하였다. 전주 관군들이 마침내 그 계략에 빠져 죽은 자가 산을 뒤덮을 정도였다. 이비장(李裨將)은 죽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되돌아왔다. 우리 이웃마을 사람 중에 속오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자가 8명이었다. 적에게 죽은 자는 1명이고 살아 돌아온 자는 7명인데, 모두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그 전투의 전말을 위와 같이 말하였다. 뒤에 한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말하기를, “쌓인 시신 속에서 적을 피해 돌아왔다”고 하였다.
당시 패전소식이 경성에 알려지자, 경성이 크게 놀라고 조정이 전 청주목사 홍재희(洪在禧, 禧는 羲의 오기)를 상장(上將)으로 삼고 청나라 장수 진(陳)·왕(王)·목(穆) 3인을 부장(部將)으로 삼아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 청나라 장수들은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서강(西江)에 배를 띄워서 내려왔다.
그들이 이번 달 초7일 전주부에 들어가 며칠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먹였다. 홍장이 본도 관찰사에게 말하기를, “저 허약한 속오군을 몰아서 전투를 벌인다면 이른바 시장사람들을 몰아서 전투를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즉시 속오군을 되돌려 보냈다. 이때 동학적도가 고부에서 승전한 이후에 사특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였다. 민간의 곡식과 말과 농기구, 농우(農牛)를 빼앗자,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도망쳐서 전답과 도랑이 모두 텅 비었다고 한다.

초 10일

맑음. 성수가 귀근하였다.

11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12일

맑음.

13일

맑음.

14일

맑음.

15일

맑음. 지당(池塘) 방백행(房百行)[효원(孝源)]이 와서 방문하였다.

16일

이성수가 와서 방문하였다. 고부의 동학도들이 경병(京兵)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틈타 도망가 무장의 산 가운데로 숨었다고 한다. 영남 관찰사 이용직(李容直)이 고부의 동학도가 영남을 침범할까 두려워 방어할 계책을 마련하였다. 한편으로는 운봉(雲峰) 팔랑치(八良峙) 아래를 지키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장수(長水) 육십령(六十嶺) 아래에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주둔하던 군사들이 민간에 토색질하고 혹 상인들의 재물을 협박해 빼앗는 행동을 하여 거주민들이 버티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향약(鄕約)을 시행하였는데, 5가(五家)를 1통(統)으로 삼고 방(坊)에 약정(約正)을 두고, 호(戶)에 통수(統首)를 두며, 50호를 묶어 벼 5섬을 거두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빈부(貧富)에 따라 차등을 두어 각 고을에서 쌀을 거두어 보관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동학도가 창궐하여 이웃 백성들이 농사를 폐기하고 멀리 달아난 사람이 많았다. 순창 군수가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옛 땅에 모여 살게 하는 방도로 방어하는 계책을 삼고 전날 각 고을에 거두어 보관했던 쌀로 구황하는 방도로 삼으니, 거주민들이 모두 안정되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17일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었다.

18일

쾌청하였다.

19일

무지개가 서쪽에 나타났다. 비가 조금 내렸다. 비류(匪類)가 세 고을의 병장기를 탈취하고 정읍(井邑)과 무장(茂長)의 아전과 백성들의 집을 불태워 남아있는 것이라곤 관사(官舍)뿐이었다. 비류가 나주(羅州)로 진격한다고 큰소리를 치자 나주군수 민종렬씨(閔鍾烈氏, 鍾은 種의 오기)가 강진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성을 방어할 계책으로 삼았다. 병사(兵使)가 속현의 속오군을 모집하여 보낸다고 하였다. 저물녁에 창평(昌平) 고치인(高致仁)이 와서 방문하였다.

19일

밤에 하늘이 진동하였는데, 사람들이 천고명(天皷鳴)이라고 하였다.

20일

맑음. 초토사 홍재희가 보낸 감결(甘結) 내용 중에, “비류가 갈수록 더욱 창궐하여 혹 모였다가 흩어져서 확실히 어느 곳에 있는 줄 모르니, 각 현과 각 방(坊)에서 나타나는 대로 속히 보고하고 거주하는 산천의 지형과 수효의 다소를 기록하여 빨리 알리도록 하라. 만약 적의 우두머리를 붙잡을 경우, 비록 옛날 동학에 물들었던 사람이더라도 그 공으로 속죄하여 우선 풀어주고 즉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그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또한 적의 괴수를 섬멸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죄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21일

맑음. 맑았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충청도 비류 역시 그 무리를 불러 모아서 호중(湖中)의 많은 사대부가 곤욕을 당했다.

22일

맑음. 저물녘에 가친께서 한양에 가셨다가 돌아오셨다. 번거로운 일로 피로가 심해져서 매우 걱정이다. 지난해 가을에 선대(先代)의 일로 한양에 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되돌아오신 것이다.

23일

맑음.

24일

맑음.

25일

맑음. 선세(先世)의 분황례(焚黃禮)를 행하였다. 5대 조고(祖考)의 효행이 임금께 아뢰어져 사헌부 감찰에 특증(特贈)되었고, 생정(生庭) 5대조 역시 효행으로 사헌부 감찰에 특증되었으며, 종고조(從高祖)와 재종증조(再從曾祖) 역시 효행으로 교관(敎官)에 추증되었다. 삼종대부(三從大父)께서도 성은(聖恩)을 받아서 금부도사에 제수되었고, 사촌동생이 사마시에 합격하니 참으로 온 가문의 큰 경사라고 할 수 있다.

26일

맑음. 축하 연회를 치렀다. 밤이 되자 비가 내렸다.

27일

맑음.

28일

맑음.

29일

이 때에 가뭄 걱정이 매우 심하였는데, 한번 비가 부슬부슬 내려 농가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30일

아침에 비가 내리고 오후에 개었다. 비류가 전주감영을 함락시키자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여산(礪山)으로 피신해서 들어갔다. 성중(城中)의 아전과 백성들 중 성을 넘다가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당시 관군은 고부에 머물렀는데 비류가 예상 밖의 계책으로 전라감영을 함락시키니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웠다.

주석
본도의 동적들이 고부 두승산(頭僧山)에 모였다. 전라감사가 비장(裨將) 이모(李某, 이경호)를 보내, 군사 수백 명과 열읍의 속오군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 전투는 1894년 4월 6∼7일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벌어진 황토현전투이다. 따라서 전라감사 이모는 이경호(李景鎬)를 가리키며, 두승산은 도교산(道橋山)을 말한다.
무장의 산 농민군은 무장으로 진출해 여시뫼(狐山峰)에 주둔했다. 무장에는 무장산이 없다.
분황례(焚黃禮) 관직이 추증(追贈)될 경우, 사령장과 그 부본을 받으면 추증된 인물의 무덤 앞에 이를 알리고 부분을 불태우는 의식을 말한다.
당시 관군은 고부에 머물렀는데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은 당시 농민군이 남하하자 뒤를 쫓아오다가 장성에서 전투를 벌여 패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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