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六月]
초토사 홍재희가 군사를 되돌려 서울로 가다가 전주 감영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여 불우의 사태를 대비하였다고 한다. 아, 한번 동학이 창궐하자 탐오한 관리들이 몰래 마음껏 제 욕심을 부려 군수품과 요역이 날로 많아졌다.
초5일
한 밤중에 큰 별 하나가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가다가 중지하였는데, 별빛이 닿는 곳마다 초목이 모두 빛이 났다.
초6일
비가 그치고 맑아졌다.
초7일
비가 내리다가 또 맑아졌다. 오후에 큰 비가 내렸다.
초8일
비가 내리다가 또 맑아졌다. 동학도가 다시 도당을 모아 태인(泰仁)에서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직까지 관아에 돌아오지 않았다. 적들이 하루 머물다가 옥과(玉果)를 향해 갔는데, 담양(潭陽)·창평(昌平)·동복(同福)·낙안(樂安)·순천(順天)·보성(寶城)을 넘어 곡성(谷城)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남원(南原)으로 진격한다고 큰소리를 치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동학 적도가 지나가는 여러 고을마다 고을의 수령들이 소를 잡고 술을 가지고 위로하거나 더러는 도피하였다고 한다. 적들이 고을마다 가득 차 있으며 백성들에게 총과 말을 거두어들이고, 부유한 백성들의 돈과 곡식을 토색질하고, 아무리 사소한 원한일지라도 반드시 보복하자, 거주하는 백성들이 산에 올라가 떠돌아 다녔다.
25일
적의 괴수 김개남(金開南)이 남원에 들어갔는데, 잔악한 행동이 특히 심하였으며 민간의 총과 말을 찾아내었다. 먼저 들어간 자가 이미 탈취하여 떠났는데 뒤에 온 자가 또 수색하자 이미 빼앗겼다고 말을 했지만, 도리어 숨기고 내놓지 않는다고 여겨 온갖 형벌과 욕을 하였다. 총과 말을 돈으로 대신 추심하여 빼앗아가는 경우에까지 이르렀다. 적당이 각 곳에서 도회(都會)하였는데, 그 무리가 각각 수천 명이었다. 여러 고을에는 모두 접주(接主)가 있는데, 대접(大接)은 수만 명이 있고 소접(小接)은 수천 명이 있었다. 이들이 부유한 백성들에게 잔악한 행동을 하여 모두 집을 비우고 도피하였다. 적당이 촌락을 제멋대로 횡횡하며 자칭 ‘도인(道人)’이라고 말하며 그 무리로 들어오지 않는 자는 ‘속인(俗人)’이라고 지목하였다. 부유한 백성이 사는 마을에 부자가 보이지 않으면 마을사람을 잘못 붙잡고서 부자의 거취를 물어보고 온갖 잔학한 행동을 하였다. 촌가(村家)의 물품들을 부자가 외부에 숨겨둔 물건이라고 하여 끝까지 뒤져서 빼앗아갔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인 사람 모두 촌락이 거의 텅빌 지경이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의 돈과 재물을 아껴 동학도를 추종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이때 적당의 괴수 김개남, 전녹두, 손화중(孫化仲, 化仲은 華仲의 오기) 그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팔도 비류의 괴수는 최시형(崔時亨)과 서장옥(徐丈玉) 두 괴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