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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병인년(1926)

4월 모일 새 황제께서 승하하였다. 곡반(哭班)과 의절(儀節)은 한결같이 옛 법식을 따라 행하였다. 휘호(徽號)를 순종황제(純宗皇帝)라고 올리고, 유릉(裕陵)에 장사를 지냈다. 이 때 경성 안의 남녀노소가 모두 돈화문(敦化門) 밖에 나와 엎드리고 애통한 심정으로 곡을 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니 마치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과 같이 하였다. 인산(因山)하던 날에도 이와 같았다. 많은 시골 남녀들도 상경하여 늘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통곡하니, 기미년(1919) 인봉(因封)할 때보다 심하였다. 이는 5백년 교화 속에서 생육하던 민생들이 지금 국운이 영원히 끝나려고 할 때에 어찌 애통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애통한 일이다. -이른바 이항구(李恒九)는 예식과장(禮式課長)으로서 장례를 치를 적에 의절을 엄숙해야 하는데 심히 소홀히 하여 전혀 장례식의 의절을 갖추지 못하였다. (원문결락) 조차도 구비하지 않아 종척(宗戚)과 집사(執事)들이 주머니 돈을 거두어 사서 사용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아, 우리나라가 단군과 기자 이후 나라가 바뀌고 임금이 교체된 경우가 많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오직 초(楚)나라 사람이 물건을 잃으면 초나라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이기에 나라가 비록 망하였어도 국경은 오히려 그대로 있고 백성도 그대로 있었다. 그러니 이 혁명(革命)은 참으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삼천리 강토가 강한 이웃나라에게 병탄되어 2천만 생령(生靈)이 둥지가 엎어질 때 깨진 알이 되어 나무와 바위에 안착하지 못하고 물과 불 속에 혼입되니 애통하도다, 애통하도다. 장차 하늘에 하소연하겠는가, 땅에 하소연하겠는가. 단지, 이 외지고 좁은 나라에서 태어나 좋지 않은 운수를 만나 온갖 어려움을 다 겪고 마침내 차마 당하지 않아야 할 일을 직접 보았으니,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살던 사람은 필시 이러한 엄청난 화란을 만나지 않았고, 나보다 뒤에 태어나 살아갈 사람은 다시 태평한 시기를 볼 것이다. 오직 보잘것 없이 불안한 한 사람이 정해진 거처가 없고 어디로 갈 방향을 모른 채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이 없구나. 나가면 오리나 기러기가 주살과 그물을 무서워하는 듯이 행동해야하고, 들어오면 금수(禽獸)가 그물과 함정을 살피듯이 조심해야 한다. 신세가 이와 같아 겨우 한 가닥 실날 같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구차스럽지 않는가. 불씨(佛氏)의 이른바 삼생설(三生說)이 과연 틀리지 않다면 이 몸 역시 내세(來生)에 환생하여 태평시대의 백성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세상에 담론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영해부사(寧海府使) 이정(李)은 바로 유현(儒賢)의 후손이며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명문가 출신이다. 당연히 지조를 지키고 염치를 숭상하며 근면하게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데, 도리어 백성을 학대하고 탐욕을 일삼아 민요(民擾)까지 발생하여 살해를 당하였으니, 화란을 실로 자초한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탐관오리를 충신으로 삼고, 비명횡사를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것으로 여겨 아름다운 시호(諡號)로 포양하고 그 자손에게 녹(祿)을 내려주니 참으로 선악의 구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을 다스리는 정령(政令)이 어찌 이처럼 잘못될 수 있단 말인가?

담론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평한다. 대원군은 그 존귀함이 어떠한가, 이미 섭정하였다면 마땅히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보필하였던 것을 본받아 예악(禮樂)을 정비하고 형정(刑政)을 삼가고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세금을 경감해야 했다. 그런데 도리어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세금을 마구 거두는 것을 좋아하며 화폐를 바꾸고 잡세를 징수하며 당파를 형성해서 원한을 갚고 서원을 훼철하여 선비의 기상을 꺾고 징병을 없애서 국세(國勢)를 고립시키는 등 기타 제반 여러 증세가 나라를 그르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권력을 다투어 천륜(天倫)을 저버려서 국가가 편안할 날이 없이 화란의 길로 들어서는 발판을 초래하였으니, 어찌 탄식을 견딜 수 있겠는가?

담론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우리나라는 바다 모퉁이 궁벽한 곳에 위치하여 쇄국정책으로 국경을 지키고 동서양과 교통하지 않았다. 단 외교로 섬기는 나라는 중국 뿐이었다. 서양이 중국과 교통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견문으로 접한 일이 있어 서양의 열강이 진보한 문명국이라는 것을 추측으로 알 수 있었다. 재능과 지식이 있는 자는 진실로 서양 국민의 진보와 기술의 발전을 널리 관찰하였다. 우리 측에서 먼저 통신(通信)과 통상(通商)을 요구하는 것이 괜찮았는데, 도리어 저들의 군함이 탐험하려고 와서 정박한 것을 온갖 의심하고 급급히 토벌하여 몰아내었으니, 이는 식견이 없고 일에 어두운 소견이 아닌가. 만약 그 당시 환영하고 잘 대우하고 교사(敎師)를 고빙(雇聘)하여 그 기술을 배우고 이익의 근원을 추구하였으면 거의 동양의 패주(覇主)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폐단은 다만 예학(禮學)으로 어두운 방안에서 종사(從事)할 뿐이고 대문 밖에 수많은 병마(兵馬)가 내달리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혹 서양을 말하는 자를 이단으로 몰아붙였다. 이 때문에 정다산(丁茶山, 정약용의 호)과 같은 자도 종신토록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그리고 박헌재(朴瓛齋, 박규수의 호)와 같은 이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서양 학술서적을 구해서 왔지만 감히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로써 결국 오늘날 전국의 인민(人民)들이 포로가 되는 지경을 초래하였으니, 탄식을 견딜 수 있으리오.

담론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수레는 바퀴의 치수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다. 두 나라는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이니, 강화를 맺지 않으면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천여 년 동안 자주 우리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임진왜란의 경우 크게 패배하여 돌아갔지만, 아직도 승냥이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으며 잠시라도 그 수치심을 잊지 않고 있다.
근래에 일본국의 문화가 증진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 이롭지 않으며 조만간에 일이 일어날 것임은 진실로 예상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부국강병에 힘쓰지 않고 전적으로 편안함을 일삼으며 고질적인 당쟁과 권력쟁탈로 인하여 눈앞의 고식(姑息)만을 능사로 삼았다. 또한 창고의 재화가 모두 겉치레에 쓸데없이 허비되어 늘 부족함을 걱정하였다. 군적(軍籍)이 감축되어 향병(鄕兵)을 없애고 호세(戶稅)를 증가시킨 나머지 보존된 자가 거의 없었다. 또한 전혀 군대를 교련(敎鍊)하지 않아, 장관(將官)은 병술을 익히지 않고 구차히 제 뱃속만 채우는 것으로 살아가는 방도로 삼고, 군졸은 급박한 상황에 진격할 줄 모르고 창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으로 기예를 삼았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시대를 맞아 어떻게 스스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전날의 유감을 풀고 선진국에 고개를 숙이고 교린(交隣)을 맺고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잘 작성하기를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진(晉)나라와 초(楚)나라를 잘 섬김으로써 동맹을 맺고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도모하는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갓 중국의 강대함만 믿고 전적으로 사대(事大) 관계만을 고집하고 의지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과는 대화할 적에 원수처럼 대하거나 초(楚) 나라와 월(越) 나라처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았다. 형세가 절박하여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어찌 통상조략(通商條略)의 정식(程式)을 대략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지체가 낮은 사람은 버려두고 오직 지위가 높은 사람을 선정하였기 때문에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는 완고한 무관 출신 고위관리로 전권대신을 삼아 조략(條略)을 잘못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만국공법』에는 각국 공관을 개항지 안에 설치하고 도성 안에는 건설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이번 이 조약에서는 ‘인천지한성(仁川之漢城)’의 한 행 가운데 ‘지(之)’ 자로 저들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이 이를 빙자하여 도성 안에 공관을 짓고 크게 시장을 열었다-

또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은 청당(淸黨)에 붙은 자로써 청관(淸館)을 도성 안에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때문에 각국이 모두 이를 모방하여 제일 먼저 이현(泥峴)에 일본인이 거주하고 공관을 건설하였다. 일본 공관은 황궁(皇宮)과의 거리가 근접하여 병력을 신속하게 움직이고 적(賊)을 은닉시키고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매우 한탄스러운 일이다.

담론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우리나라의 조세 세입은 여유가 있어서 백관(百官)에게 녹봉을 주고 군병에게 급료를 지급하였고, 이외의 각종 항목에 지출되었다. 그런데 어찌 하여 국고(國庫)가 텅 비어 백관과 군병에게 지급되는 녹봉과 급료를 4~5달 혹 1~2년을 지급하지 못하였는가. 그리하여 대개 관리들이 굶주림을 참고 벼슬살이를 하면서 관작을 중히 여기게 되었다. 또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나대(挪貸, 공금을 백성에게 빌려주거나 꾸어줌)하여 그 이익을 먹고 살았다. 군병의 경우 급료가 아니면 입에 풀칠할 수가 없고 처자를 살릴 수가 없으니, 어떻게 굶주린 배를 참고 군대의 대열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아, 호조와 선혜청 관리는 오로지 훔쳐 먹는 것을 일삼고 군졸들을 구휼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 죄가 실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 대장이 된 사람이 자기의 높은 지위를 다행스럽게 여기고 거느리고 있던 군졸들의 배고픈 원망을 모르고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아서 난리를 일으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간성(干城, 국가를 방어하는 인물)의 재목이겠는가?

정부의 대신이 된 자는 앉아서 후한 녹봉을 받고 매관매직하며 뇌물을 받고 자신의 가옥과 제 뱃속만을 윤택하게 하면서 관원과 군졸이 기아상태에 이른 상황을 모르니 이 어찌 섭리의 재목이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무는 아래에 있고 위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씨, 김씨, 민씨가 화를 당한 것은 하늘이 내린 토벌이다. 오직 곤전(坤殿, 명성황후)이 아무리 국정에 관여하였다고 하더라도 관작을 매매하는 일에 불과하였고, 비록 제사를 지내 기복(祈福)하였더라도 단지 내탕고의 돈을 가져다 쓴 것이다. 외고(外庫)가 탕진된 것을 전적으로 ≪곤전에게≫ 원망을 돌려서는 안된다.

이번 이 변란을 만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모두 사주한 자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비록 그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그 처사만을 보면, 어찌 그 비방을 면할 수 있겠는가. 그 은신했을 때를 논하면, 집정관은 응당 성심으로 국내에 방문하여 받들어 맞아다가 지위를 회복시켜서 전의 혐의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속히 화합을 도모하며, 곤덕(坤德)을 새롭게 하고 종실과 외척들이 모두 국정에 관여할 수 없게 하며 여러 신료들로 하여금 각각 여러 직무를 극진히 함으로써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도모하게 하였다면, 전화위복으로 국가를 공고한 기반으로 만드는 경사가 되지 않았겠는가?

또 곤전이 과연 실덕(失德)하여 암탉이 울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심이 있었다면, 정부의 고위관리 이하 모든 신료들이 일제히 정청(庭請)하여 대조(大朝)에 아뢰어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삼는 것이 비록 부득이한 일일지라도 오히려 해야 할 일이나, 이미 살해를 당한 실적(實跡)이 없었으며, 또 그 시신을 찾지 않고 가짜로 국휼(國恤)을 반포하여 억지로 신민(臣民)들에게 상복을 입게 하고 가짜로 의대(衣襨)만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산릉(山陵) 자리를 잡고 도감(都監)을 설치하는 등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짓을 하여 나라의 체모를 크게 훼손시키고 외국에게 수모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부끄럽지 아니한가?

담론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평한다. 나라가 혼란하려고 하는 데에는 반드시 임금 가까이 아부하는 신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가장 먼저 신하의 어짊과 사특함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저 갑신년(1884, 고종 21) 오적(五賊)은 본래 경박한 재주로 외교에 뛰어나다고 자칭하며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을 친애하는 의리를 따르지 않고 몰래 외국의 손을 빌려 분수를 범하려는 계획을 품고서 간사한 계획을 세워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였으니, 어찌 역적이라는 이름을 면할 수 있겠는가? 근자에 신진(新進)의 젊은 사람들이 이 일을 논하기를, “다섯 사람은 오로지 옛 정치를 개혁하여 문명국으로 개진(開進)하려고 한 것이지, 임금과 나라를 바꾸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이 말은 비록 반신반의하는 처지인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그 무리들이 만일 옛 것을 혁신하려고 하였다면, 이미 임금의 신임을 받아 밤낮으로 공무에서 임금과 좋은 의견을 나누는 처지였으니,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각국 문화의 상황을 진달하고 간절한 정성으로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를 기하여 상하가 서로 믿고 화합해서 차츰 실행해나가고 그 늦음을 걱정하지 말아야 했다. 만약 혹 임금의 마음이 끝내 깨닫지 못했을 경우는 단지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면 오히려 충신이나 지혜로운 선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 무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임금의 총애를 받아 지위를 확보한 날로부터 은밀히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힘이 센 무뢰배 10여 명을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훗날의 쓰임에 대비하였다. 제일 먼저 큰 가옥을 짓고 화려하게 건물을 치장하여 어느덧 대궐의 건물과 같았다. 모든 행동이 분수를 범하고 예의가 없는 짓이었다. 매양 향촌의 절친한 사람이나 친척들을 만나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너희들이 벼슬길에 올라 크게 형통하리라”고 한 것은 바로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흉악한 계획을 행하려는 것이었다.

또 당시 나라의 척리(戚里)와 충신이 모두 피살을 당하였다. 그런데 황제의 가장 측근인 이재원(李載元)을 임금 곁에 불러 두고 죽이지 않는 이유는 교지(敎旨)를 내려 옥새와 비단 도포를 탈취하는 등의 일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바야흐로 양위(讓位)를 독촉하고 전지(傳旨)할 때 이재원을 시켜 먼저 임금의 옥로(玉鷺)를 거두게 하였는데 이재원이 벌벌 떨며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임금이 친히 스스로 깨뜨려서 이재원의 훗날 죄명을 가리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 일을 비록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더라도 어찌 전혀 근거 없는 말이겠는가. 더구나 황제의 곁에 모시던 유재현(柳載賢)은 저들이 찬탈하고 반역한 실상을 직접 보고 통렬하고 분한 마음으로 욕을 하다가 즉석에서 칼을 맞고 피살되었으니, 이것이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대체로 그들이 역모를 일으킨 실상은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가릴 수 없다. 지금 신진(新進)들의 말은 당동벌이(黨同伐異)의 논의에 불과하니, 굳이 취택할 필요가 없다.

대개 우리나라 임금은 선세(先世)로부터 국란(國亂)을 당할 경우 도성과 궁궐을 스스로 지킬 수 없으면 파천(播遷)하는 것을 장기(長技)로 삼아 이내 일상적인 버릇이 되어 버렸다. 만약 그 때에 위에서 맹렬한 기세로 단호히 결단하여 즉시 각 군영의 장수와 병졸을 불러 호위하게 하고, 또 정부의 여러 신료들을 불러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면 저들이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달아나 물러났을 것이다.

군병은 명분 없이 움직일 수 없다. 또 각 군영의 장신(將臣)이 경우궁(景祐宮)에 들어간 때는 사태가 급박하게 전환된 것을 스스로 헤아려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법을 범하더라도 각기 칼과 총을 휴대하고 군병을 거느리고 기세를 몰아 곧장 전폐(殿陛)에 들어가, 한편으로는 임금을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저들의 군사와 접전하였다면, 청나라 군사의 구원병이 아니더라도 저들은 스스로 도망갔을 것이다. 어찌 하여 혼자 맨손으로 평상시처럼 부름에 대궐로 들어갔다가 흉악한 역적의 칼날에 죽임을 당했단 말인가?
혹자가 말하기를, “궁궐의 담장은 매우 높고 일본병사가 궁궐을 빙둘러 에워싸고 있어서 넘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하나,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각 군영의 장수와 병졸은 그들의 군병보다 배가 더 많았으니, 각기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진격하며 건장한 자를 택하여 선봉으로 삼았으면 담장도 넘을 수 있고 대문도 부술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 측이 많고 저들이 적고, 우리는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이고 저들은 재물에 현혹되어 온 군사들이니 형세가 만일 위급한 지경에 이르면 저들은 필시 먼저 달아났을 것이다. 이처럼 궁문(宮門) 내외에서 접전이 일어났다면, 저들은 두려운 마음이 자연히 생겨서 필시 감히 강제로 황제의 양위를 재촉하거나 황제를 협박하여 욕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또 들으니, 당시 일본 군함이 바다 가운데로 나와 있다가 배가 파손되어 도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곳에 있던 일본병사가 많지 않았음을 또한 헤아려 알 수 있다.

대체로 변란이 발생할 기미는 일전에 미국공사(美國公使)가 장신(將臣) 윤태준(尹泰駿)의 □□(원문결락)에게 수일 내에 귀국에 필시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 말이다. 이 말을 미국공사가 장신 윤태준에게 하자, 윤태준은 이질(姨姪) 서재필(徐載弼)에게 이에 대해 물어 보았다. 서재필은 저들과 같은 무리로 얼굴색이 변하며 답하기를, “이런 황당무계한 말을 무엇 때문에 저에게 말하십니까. 저는 다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즉시 일어났다. 윤장(尹將, 윤태준)이 전혀 의심 없이 편히 믿고 있다가 마침내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먼저 그들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윤장은 진실로 몽매한 사람이다. 응당 대궐에 들어가겠다고 고하고 미리 방어책을 세웠다면 어찌 임금이 파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겠는가?

설령 임금께서 미혹되어 저들이 아부하는 말을 듣고 망녕되이 파천하였더라도, 윤태준은 반드시 미리 각 영사(領使)에게 통지하여 역적을 물리치고 임금을 보호할 계책을 준비하였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편안히 앉아 있었으니 장차 자신에게 불길이 이르는 줄을 모른 것이다. 이는 지위가 높아 고기를 먹는 관원이면서도 계책이 없는 사람이다.

또 각 군영의 병방(兵房)으로 말하자면, 여러 영사(領使)가 단신으로 부름을 받고 입궁하여 군신(君臣)이 모두 철롱(鐵籠) 가운데에 구금되어 있었으니, 어느 겨를에 임금의 명을 받들고 대장(大將)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병방은 아장(亞將)이다. 대장이 없으면 아장이 대신 군병을 지휘해야 하는 것인데, 이처럼 화란의 상황이 급박히 내달리던 시기에 어찌 마음 편히 하고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단 말인가?
혹자가 말하기를, “각 군영의 병방을 임시로 체직시키면 군병을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나,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옛 명장(名將)이 말하기를, ‘장수가 외지에 있으면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당시 직책을 체직시키는 것은 임금이 직접 명한 것이 아니라 왕명을 사칭한 것임이 분명하다. 위왕(魏王)의 밀부(密符)도 진비(晉鄙)는 의심하여 병력을 양도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장수를 바꾼 것이 어찌 우리 임금이 기꺼이 한 일이겠는가?

여러 장관(將官)이 당연히 일체 단합하여 군졸(軍卒)을 엄히 단속하고 사리(事理)를 가지고 깨우쳤다면 교화 속에서 자라고 배양되었던 군사들이니 어찌 저들을 배반하고 이들에게 와서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나아가 이리저리 진격하지 않았겠는가. 무릇 이와 같았다면 우리 임금을 물과 불 속에서 구제하고 우리 장수를 화살과 탄환이 쏟아지는 사이에서 도와 저 역적을 사로잡고 그 목을 베어 종묘사직을 다시 편안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찌 공의를 권장하여 속죄하고 다시 기린각(麒麟閣)에 공신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다음날 청병(淸將)이 군사를 일으켜서 우영병방(右營兵房) 신석희(申奭熙)를 붙잡아 끌고 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선두에 서서 나아가게 하였다. 신석희는 임금의 명령과 장수의 명령이 없는 상황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청나라 장수의 강압을 어기기 어려워 부득이 군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길잡이가 되어 탄환 없이 빈총만을 쏘았다. 하지만 청나라 군사가 이를 보고 신석희를 협박하자 눈물을 흘려 두건이 적실 정도였지만 할 수 없이 탄환을 장전하여 총을 발사하였다. 마침내 청나라 장수 원세개와 입궁하여 성공한 후 죄안(罪案)으로 삼지 않았다.

이를 가지고 본다면 위에서 진술한 말은 임시변통에 통달한 담론이 아니겠는가. -옛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임금이 포위를 당할 경우 외지에 있는 장수와 군사가 당연히 가서 구출한다. 우리나라는 평상시의 규정을 고수하고 마음 편히 앉아만 있었으니 우활한 선비의 평상시 습속이 아니겠는가- 다만 여러 역적으로 -오적(五賊) 및 생도- 말하자면, 대대로 녹봉을 받은 은혜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반역의 마음을 외람되이 품었다가 혹 주륙을 당하였거나 혹 달아나 목숨을 보전한 자들이다. 그러나 부모와 처자까지 화(禍)를 당하게 하였는데, 무슨 얼굴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국가가 바뀌는 혁명 이후 스스로 제 시절을 만났다고 여기니 뻔뻔하게 염치가 없다. 다른 사람이 침을 뱉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세력을 빙자하여 남을 멸시하며 의기양양하며 즐거워하고 있으니 진실로 가소롭다.

너희 역적이 한 번 생각해 보라. 이역(異域)에서의 나그네 생활로 풍상(風霜)을 겪었지만 한갓 10년 노고만을 받았고, 더구나 열국(列國)의 사필(史筆)에 백세동안 씻을 수 없는 죄명(罪名)에 있어서랴. 어버이의 묘소에 나아가면 원통한 귀신이 슬피 울음을 울 것이고 집을 나와 친족을 만나면 예전의 항렬(行列)이 다 바뀌어 있을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결국에는 일본에 나라를 양도하고 이완용에게 재물을 양도하였다. 너희들이 차지한 것이라곤 자신의 뱃속만 채우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속담에 ‘큰 창고를 다 불태우고 쌀가루나 주어 먹는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담론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평한다. 호남의 민란은 쥐나 개처럼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이라고 할 수 있다. 본국의 군사를 가지고 이를 토벌하는 것도 여력이 있었는데, 홍계훈(洪啓薰)이 경솔하게 군사를 되돌렸으니 매우 이상하다. 적의 소굴이 아직도 토벌되지 않았고 또 적의 귀를 한 개라도 잘라 올리는 공로가 없었는데, 무슨 명목으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고 조정으로 되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첫 번째 죄이다. 그 다음으로 삼남의 수군과 육군이 또한 충분히 침입을 막고 토벌할 수 있었는데, 감영(監營) · 병영(兵營) · 수영(水營) 세 군영의 수신(帥臣)이 모두 두건을 벗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있었으니 또한 괴이하다. 국가에서 주요지역과 변경지역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병을 조련한 본래 취지는 만일 뜻밖의 일이 발생하면 방비하여 토벌하는 것이지, 그들의 녹봉과 곡식 · 의복의 밑천이나 관직의 승급과 품계가 오르는 기회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군사를 끼고 깃발을 휘두르며 길가는 사람을 꾸짖고 의기양양 마을을 지나가며 위엄을 부리고 무력을 뽐내는 것은 한갓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자일 뿐이다.
결국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공주(公州) 중군(中軍) 이기동(李基東)과 협의하고 분격하여 동학군을 크게 격파하여 물리치고 그 우두머리 전봉준(田奉準- 全琫準의 오기)의 머리를 베고 개선하였다. 이를 가지고 보면, 이전의 여러 수신(帥臣)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또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조정의 일을 가지고 논하면 애당초 묘당(廟堂)에서 회의할 때 응당 먼저 감영과 병영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고 또 경영대장(京營大將)이 가서 적의 소굴을 토벌하게 하였다면 승리하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어찌 하여 이웃나라의 군병을 빌렸는가. 더구나 만국공법에 한 나라의 군병이 움직이면 각국이 모두 병력을 움직일 수 있다. 외무독판(外務督辦) 조병직(趙秉稷)이 반드시 이를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듯이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김홍집의 말에 따라 아뢰어, 본국의 큰 난리로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화근을 만들어 주었다. 이 또한 탄식스럽다.

주석
삼생설(三生說) 불가(佛家)의 문자로, 전세(前世) · 현세(現世) · 후세(後世)를 가리킨다.
수레는 바퀴의 치수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다 『중용』에 “수레는 바퀴의 치수가 같으며 글은 문자가 같으며 행동은 윤리가 같다.[車同軌 書同文 行同倫]”라고 하였다. 즉 같은 문화권이라는 말이다.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도모하는 것 춘추시대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간공(簡公) · 정공(定公) · 헌공(獻公) · 성공(聲公) 등 네 조정에 계속 재상으로 있으면서 뛰어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당시 패권다툼을 벌이는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 사이에 처한 정 나라를 무사하게 보전하였다.
옥새와 비단 도포를 탈취 당나라 현종(玄宗)이 이태백(李太白)을 불러 악장(樂章)을 짓게 하고는 상으로 짐승 모양을 그린 비단 도포를 준다고 했다. 그런데 악장을 다 지은 뒤에 현종이 짐짓 장난삼아 그 비단 도포를 주지 않았다. 이에 이태백이 이를 빼앗으려고 하자 현종이 웃으면서 주었다는 말이 있다.
옥로(玉鷺) 옥로는 정자(頂子)의 일종이다. 옥로로 장식한 갓을 옥로립(玉鷺笠)이라 한다.
당동벌이(黨同伐異) 같은 무리를 무조건 두둔하고 다른 사람을 무조건 물리친다는 말이다.
계책이 없는 사람이다 원문의 육식(肉食)이란 고기를 먹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춘추좌전』장공(莊公) 10년에 “고기 먹는 자들이 꾀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또 참견하려 하는가[肉食者謀之 又何間焉]”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병력을 양도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군대를 보내 조(趙)나라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이 위왕(魏王)의 병부(兵符)를 몰래 훔친 다음에 10만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진비(晉鄙)의 진영으로 가서 군대를 받아서 지휘하려고 하였는데, 진비가 이를 의심하고 군대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진비를 죽이고 그 군대를 인솔하여 마침내 조나라를 구원하였다.
기린각(麒麟閣)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기린각에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두었다.
항렬(行列)이 다 바뀌어 있을 것이니 갑신정변 주모자의 일족들이 반역 행위를 수치스럽게 여겨 항렬의 글자를 고쳤다. 이를테면 김옥균의 ‘均’자 항렬은 ‘圭’자로, 박영효의 ‘泳’자 항렬은 ‘勝’자로, 서광범의 ‘光’자 항렬은 ‘丙’자로, 서재필의 ‘載’자 항렬은 ‘廷’자로, 홍영식의 ‘植’자 항렬은 ‘杓’자로 고쳤다.
전봉준(田奉準- 全琫準의 오기)의 머리를 베고 개선하였다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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