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3월[甲午三月]
호남의 민란이 연초부터 시작되었는데, 갈수록 창궐하였다. 동학당이 무리를 불러 모으고 세력을 규합하여 머리에 두건을 싸매고, 창을 지닌 자 4∼5천명이 8고을 무장(茂長)·금구(金溝)·고부(古阜)·태인(泰仁)·고창(高敞)·부안(扶安)·흥양(興陽)의( )군기(軍器)를 탈취하였으며 영광(靈光)에 모여 진을 쳤다. 깃발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쓰고, 또 포고문을 작성하여 온 전라도에 돌려서 알렸다. 그 요점은 탐욕한 관리들을 징계하고 뇌물을 주는 길을 끊고 서양의 무리들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중앙에서 병사를 조달하였지만 경군(京軍)과 향군(鄕軍)이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서 싸우지를 못하고 50리쯤 물러나 진을 쳤다. 초토사는 임오년에 공을 세운 홍재희(洪在僖, 僖은 羲의 오자)다. 중궁전을 모시고 몰래 피난하였다. 김해에 민란이 갑자기 일어나서 본군 사또 조준구(趙駿九)를 잡아 끌어내고 부절(符節)을 훔쳤으며 감영에 글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