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894년 1월 1일 기묘 [光緖二十年 (甲午 正月) 初一日 己卯]

새벽녘에 합문(閤門, 便殿의 앞문) 안에서 문안을 할 때에 백관(百官)이 들어와서 참례하였다. 교리(校理) 심상황(沈相璜)과 교리 김사준(金思準) 씨가 대궐에 들어와서 찾아왔다. 승지(承旨) 이해창(李海昌)과 승지 남정기(南廷綺)도 찾아왔다. 하번(下番, 대궐에서 숙직하는 아래 번)인 수찬(修撰) 이종협(李鍾浹)이 근무를 교대하고 들어왔다. 승지 정세원(鄭世源), 친구 필선(弼善) 김연규(金䄵圭), 친구 겸사서(兼司書) 이정직(李鼎稙)이 찾아왔다. 잠시 정원(政院, 승정원) · 춘방(春坊, 세자시강원) · 계방(桂坊, 세자익위사)으로 갔다. 해사(海史, 李儁의 호) 어른이 시(詩)를 지어 보내와서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밤에 춘방에서 친구 김연규와 용악(容學) · 유제(有濟)씨, 동희(東熙)와 밤늦도록 대화를 하였다. 유제 씨가 밤에 마침 성찬(盛饌)을 가지고 와서 배부르게 먹고 돌아왔다. 교리 이재건(李載乾)이 찾아와서 한나절을 담소하였다.

1월 2일 경진 [初二日 庚辰] 흐림.

승지(承旨) 남정기(南廷綺)가 근무를 하러 들어왔다. 병조 참지(兵曹 參知)가 근무를 하러 들어와서 하예(下隷)를 보내 알려왔기에 숙직을 마치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 동곡(東谷)의 승지 형님께 가서 인사를 하였다. 오위장(五衛將) 상우(商羽)가 찾아왔고, 태제(兌濟) 씨가 찾아왔다. 곧 해사(海史)에게 갔다가 정언(正言) 주재빈(朱在賓), 참봉(參奉) 박원진(朴原鎭), 교리(校理) 이범찬(李範贊)을 만났다. 학관(學官) 홍순칠(洪淳七)이 찾아왔다. 밤에 하교(河橋)에 갔다가 좌랑(佐郞) 윤우선(尹寓善)에게 들렀다.

1월 3일 신사 [三日 辛巳] 맑음.

잠시 참판 댁(參判宅)에 갔었다. 유성전(兪聖全)과 최영구(崔永九)의 아들이 찾아왔다. 태묘(太廟)의 예의(隷儀)에 참례하였다. 해사(海史) 어른이 찾아왔다. 반주인(泮主人) 안봉순(安鳳淳) 부자(父子)가 찾아와서 만났다. 종인(宗人, 촌수가 먼 일가)인 사과(司果) 김상익(金商翼), 친구 박붕서(朴鵬緖), 참판 어른, 전적(典籍) 차(車)씨가 찾아왔다. 판서 조병직(趙秉稷) 씨를 가서 뵈었는데, 공무(公務)로 승지(承旨) 정세원(鄭世源), 교리(校理) 이범찬(李範贊), 교리 장승원(張承遠), 교리 정승현(鄭承鉉), 교리 조영구(趙寧九), 사서(司書) 이정직(李鼎稙), 좌랑 윤우선(尹寓善)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밤에 해사(海史)에게 갔다. 청양(靑陽) 유치흥(兪致興)이 찾아왔다.

1월 4일 임오 [四日 壬午] 맑음.

오늘은 재숙(齋宿)하는 날이어서 본관(本館)에 나가 재계(齋戒)했다. 법식(法式)이 소중하지만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병조(兵曹)의 조방(朝房)에 나가 재계를 하였다. 화개동(花開洞)의 충제(忠濟), 사과(司果) 경제(慶濟), 첨정(僉正) 이규형(李奎衡), 반주인(泮主人) 안계(安季), 선전(宣傳) 서영구(徐榮九)가 찾아왔다. 승지(承旨) 태제(台濟) 씨와 이 판윤(李判尹) 및 유 청양(兪靑陽)이 편지를 보내왔다. 신경성(愼景星)과 해사 어른이 찾아왔다. 최경명(崔敬明)과 청기(靑綺)가 와서 술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였다. 밤에 해사에게 가서 청기와 함께 율시(律詩) 2수(首)와 절구(絶句) 1수를 짓고 성찬(盛饌)을 먹었다.

1월 5일 계미 [五日 癸未] 맑음.

홍삼(紅衫)은 낭패스럽게도 판서 이건하(李乾夏) 씨에게 빌려왔다. 손님들이 하루 종일 왔다가 갔다.

1월 6일 갑신 [六日 甲申] 맑음.

아침에 일찍 종묘(宗廟)에 나아갔다.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대가(大駕, 임금의 어가, 또는 임금을 지칭)가 와서 참배(參拜)하고 제기(祭器)와 희생(犧牲,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살핀 뒤에 대내(大內)에서 환궁(還宮)하였다. 제관(祭官)이 이에 대신(大臣)을 도와 제사를 지내고 인정(寅正, 오전 4시)에 끝내고 여러 관리들을 모두 만났다.

1월 7일 을유 [七日 乙酉] 맑음.

친구 박용서(朴龍緖)와 전적(典籍) 차(車)씨가 찾아왔다. 하루 종일 독감으로 누워 있었는데, 매우 아팠다.

1월 8일 병술 [八日 丙戌] 맑음.

최경명(崔敬明)이 고향에 내려간다고 이별하러 왔다. 그 인편에 이 승지가 있는 곳에 편지를 부쳤다. 해사(海史)가 찾아왔다. 당진(唐津) 슬항(瑟項, 지명)의 하태영(河泰永)이 편지를 보내왔다. 확재(確齋, 호) 형제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바로 하태영의 편지에 답장을 써서 슬항 인편에 부쳤는데 어느 때에 받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위장(五衛將) 이응칠(李應七, 응칠은 字이다)과 사서(司書) 형님이 찾아왔다.

1월 9일 정해 [九日 丁亥] 맑음.

편지를 써서 확재(確齋) 형제에게 보냈다. 태제(兌齋) 씨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이별하러 왔다. 해사(海史)에게 갔다가 참봉(參奉) 박후진(朴厚鎭)을 만나서 1상[一卓]을 배부르게 먹고, 곧 참판 댁에 갔다. 척숙(戚叔, 성(姓)이 다른 아저씨뻘 되는 사람)인 주서(注書) 오응(五應) 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청양(靑陽) 유치흥(兪致興)에게 편지를 보냈다. 밤에 전동(典洞)의 척숙인 주서 댁(注書宅)에 갔다가 영감 이무응(李武應)과 찰방(察訪) 이수훈(李秀薰)을 만났다. 남해(南海) 조종철(趙鍾哲) 댁의 내간(內間, 아녀자가 거처하는 곳)에 들렀다가 돌아왔다.

1월 10일 무자 [十日 戊子] 맑음.

전적(典籍) 차(車)씨가 찾아왔다. 맹현(孟峴)의 족형(族兄, 일가 중에 형뻘이 되는 사람)인 정제(定濟, 김제정) 씨와 판서 이규응(李珪應)에게 갔다. 재동(齋洞)의 사서(司書) 형님 댁에 들렀다가 승지 이종윤(李種允)을 만났다. 영감 유필환(兪弼煥), 진사(進士) 구필서(具弼書), 승지(承旨) 조형하(趙衡夏), 판서(判書) 김만식(金晩植), 판서 이건하(李乾夏)를 방문하고 계동(桂洞)에 돌아왔다.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과 참판 형님을 찾아갔다가 원동(院洞)의 상하리(上下里)를 들러서 돌아왔다. 밤에 반동(泮東, 성균관의 동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주사(主事) 최영하(崔榮夏)에게 들렀다. 이 날 밤은 달빛이 빛나서 거리가 낮과 같았다. 청기(靑綺), 태제(兌濟) 씨, 좌랑(佐郞) 윤우선(尹寓善)이 달빛을 보려고 거리를 걷다가 홀연히 교동(校洞) 거리 초입에서 만나 배회하며 조금 머물렀다.

1월 11일 기축 [十一日 己丑] 맑음.

잠시 해사(海史)에게 갔다. 경모궁(景慕宮)의 망제(望祭, 매달 음력 보름에 지내는 제사)에 대축(大祝) 제관(祭官)으로 임명하는 첩지가 도착하였다. 밤에 비와 눈이 함께 내렸다.

1월 12일 경인 [十二日 庚寅] 맑음.

길이 진창길과 같았다. 편지를 써서 하교(河橋)에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밤에 할머니 꿈을 꾸었는데, 옷이 선명하고 얼굴에는 화사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내가 옆에서 모시고 할아버지의 산소 터를 물었더니, 매우 길(吉)하다고 대답하였다. 10여 년 뒤에 처음 꿈에서 뵙고 깨어나니 감회가 서글퍼졌다. 다시 꿈에서 갑자(甲子)년에 태어났다가 5살 때 죽은 동생을 보았는데, 병든 모습에 부은 얼굴로 나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불러서 갔다”라고 하여 내가 큰소리로 부르다가 깨어나니 더욱 참담하였다. 이 동생은 이름이 해관(海寬)이라고 했는데, 매우 성숙하여 10여 세 아이와 비슷하였다. 5살에 천자문(千字文) 1권을 읽을 수 있었고, 용모가 범상하지 않고 출중하였다. 5월 5일에 태어난 것이 맹상군(孟嘗君)정일두(鄭一蠹) 공(公)과 비슷하여 집안에서 매우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두창으로 생긴 수포증(水泡痘) 때문에 끝내 구제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분통하다. 그가 제갈 선생이 잡아간다고 한 것은 정말로 괴이하다. 사람됨이 출중하여 그런 것인가? 더욱 참담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대평리(大平里)의 이대감이 편지를 보내와서 바로 답장을 하였다. 고금도(古今島)에서 돌아온 이 노인이 와서 만나보았다. 오위장(五衛將) 이응칠(李應七)이 찾아왔다.

1월 13일 신묘 [十三日 辛卯] 맑음.

남전(南殿)의 경모궁(景慕宮)에 ≪임금께서≫ 행차하여 참배하는 날이다. 밤에 화동(花洞) 주서(注書) 이정렬(李貞烈),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 대안동(大安洞)의 송도유수(松都留守) 이경직(李耕稙), 참판 황기연(黃耆淵), 교리(校理) 황회연(黃會淵), 주서 민영만(閔泳晩), 참봉(參奉) 박후진(朴厚鎭), 안현(安峴) 완평궁(完平宮), 교리 이재현(李載現), 하계동(下桂洞)의 교리 조영구(趙寧九)에게 갔다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다.

1월 14일 임진 [十四日 壬辰] 흐림.

아침에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대축(大祝)으로 망제(望祭)를 지냈다. 조 영감(趙令監)이 동쪽에 서고, 어 영감(魚令監)과 박 영감(朴令監), 헌관(獻官)인 판서 조병직(趙秉稷), 예방승지(禮房承旨) 심상찬(沈相瓚)이 종일 함께 하였고, 3경(三更, 밤 11시에서 새벽 1시)에야 제사를 끝내고 돌아왔다.

1월 15일 계사 [十五日 癸巳] 맑음.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서 지피(持彼)를 했는데 이종협(李鐘浹)과 짝을 이뤄서 했다.

1월 16일 갑오 [十六日 甲午] 맑음.

하번(下番, 근무 순서가 아래인 번)인 이종협(李鐘浹)이 근무를 끝냈고. 이인창(李寅昌)이 근무를 하러 들어와서 짝이 되었다. 참의(參議) 이최영(李最榮)이 근무하는 중에 찾아왔다.

1월 17일 을미 [十七日 乙未] 맑음.

몸이 좋지 않았으나 다른 동료를 구하지 못해 일단 가서 하번(下番)과 잠시 말을 하고 책을 보았다. 집의 하인이 와서 집안의 소식을 들었다.

1월 18일 병신[十八日 丙申] 맑음.

근무를 끝내니 해사(海史) 어른과 박용서(朴龍緖)가 찾아왔다.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이 찾아 와서 함께 교동(校洞)의 병사(兵使) 이정규(李廷珪) 집에 가서 감회를 풀었다.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가 찾아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기(靑綺)가 찾아와서 해사와 참봉(參奉) 박후진(朴厚鎭)과 함께 밤에 율시(律詩) 1수(首)를 짓고 1상을 마련하여 ≪술을≫ 먹다가 새벽이 되어서 흩어졌다.

1월 19일 정유 [十九日 丁酉] 맑음.

화산(花山)의 친구 이필(李佖)과 종인(宗人, 촌수가 먼 일가)으로 남포(藍浦)사람 제(濟)가 찾아왔다. 집의 하인이 갔다가 돌아왔다. 좌랑(佐郞) 윤우선(尹寓善)과 참판 어른이 찾아왔다.

1월 20일 무진 [二十日 戊辰] 맑음.

원동(院洞)에 갔다가 참판 댁과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 字는 景良이다)에게 들렀다. 참봉 이호면(李浩冕) 형제에게 가서 조문(弔問)을 하고, 판서 조병직(趙秉稷) 씨에게 들렀다. 판윤(判尹) 이(李)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교리(校理) 조영구(趙寧九)가 찾아왔다. 잠시 해사댁(海史宅)에 갔다.

1월 21일 기해 [二十一日 己亥] 맑음.

친구 이필(李佖)이 찾아왔고, 사서(司書) 형제가 찾아왔다.

1월 22일 경자 [二十二日 庚子] 맑음.

병사(兵使) 이씨가 찾아왔고,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가 찾아왔다. 밤에 해사댁(海史宅)에 갔다.

1월 23일 신축 [二十三日 辛丑] 맑음.

병사(兵使) 이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교리(校理) 신응선(申應善) 씨와 유필환(兪弼煥) 영감, 친구 이필(李佖)과 함열(咸悅)의 김씨가 찾아왔다. 화동(花洞)의 주서(注書) 이정렬(李貞烈)에게 갔다가 교리 조범구(趙範九)를 만났다. 판서(判書) 김만식(金晩植), 판서 조병직(趙秉稷), 족형(族兄)인 참판 댁과 사서 댁(司書宅)을 들렀다. 밤에 동촌(東村)에 갔다가 돌아왔다.

1월 24일 임인 [二十四日 壬寅]

희제(希濟)가 화산(華山)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공주(公州)의 정계(晶溪) 이명구(李命求)가 회시(會試)때문에 서울에 도착하여 찾아와서 아울러 계씨(季氏) 내외의 편지를 갖춰 전해주어 기쁘게 맞이하였다. 해사(海史) 어른과 오위장(五衛將) 이응칠(李應七)이 찾아왔다. 밤에 전동(磚洞)의 병조 판서에서 물러난 민영소(閔泳韶)에게 갔다가 교리(校理) 신응선(申應善) 씨, 유필환(兪弼煥) 영감, 교리 황회연(黃會淵), 사서(司書)로 족형(族兄)인 김병제(金炳濟) 영감 등을 만났다. 송현(松峴)의 인천(仁川) 어른에게 들렀다가 교리 장석오(張錫五)를 만났다.

1월 25일 계묘 [二十五日 癸卯] 비가 왔다.

참판 댁(參判宅)에 갔다가 고금도(古今島)의 오위장(五衛將) 박인겸(朴仁謙)을 만났다. 밤에 해사댁(海史宅)에 갔다.

1월 26일 갑진 [二十六日 甲辰] 비가 왔다.

청번사령(請番使令)이 왔다.

1월 27일 을사 [二十七日 乙巳] 맑음.

편지를 써서 동촌(東村)에 보냈다. 서정(西亭) 어른이 서울에 들어와서 다시 입직(入直)하였다. 전동(磚洞, 민대감)에 편지를 했는데, 민(閔) 대감이 입직하는 도중이었다. 송현(松峴)의 인천 댁(仁川宅)에 갔다가 영감 박(朴) 씨, 영감 이상락(李相洛) 씨, 교리(校理) 이종협(李鍾浹), 이인창(李寅昌) 등을 만났다. 반직(伴直, 함께 근무하는 사람)인 병조 참의(兵曹 參議) 이최영이 밤에 찾아왔다.

1월 28일 병오 [二十八日 丙午] 맑음.

도목정사(都目政事, 6월과 12월에 하는 정기인사)하는 날이다. 병조 참의(兵曹 參議)에게 갔다.

1월 29일 정미 [二十九日 丁未] 흐림.

교리(校理) 장석오(張錫五)가 사은숙배(謝恩肅拜, 벼슬을 제수 받고 임금께 인사하는 것) 때문에 번(番)을 대신 서 주기를 청하였다.

주석
필선(弼善) 세자시강원에 속한 정 4품의 벼슬이다.
반주인(泮主人) 관주인(館主人)으로, 반(泮)은 성균관의 별칭인 반궁(泮宮)을 가르킨다. 성균관의 시험을 보려고 서울에 올라온 시골 선비가 성균관 근처에서 묵던 집이나 그 집의 주인을 말한다.
청양(靑陽) 청양 수령을 지냈다는 것을 말한다.
재숙(齋宿) 제관(祭官)이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새는 것을 말한다.
조방(朝房) 조정의 신하들이 조회 시간을 기다리며 쉬던 방을 말한다.
홍삼(紅衫) 붉은 바탕에 검은 선을 두른 조복에 딸린 웃옷을 말한다.
환궁(還宮) 이 글에서 궁은 성균관을 가르킨다.
남해(南海) 조종철(趙鍾哲) 남해의 수령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성(姓)에 부쳐서 ‘조남해(趙南海)’라고 하였다.
경모궁(景慕宮)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妃)인 헌경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대축(大祝) 종묘나 문묘 제향 때에 초헌관이 술을 따르면 신위(神位)옆에서 축문을 읽는 벼슬을 말한다.
맹상군(孟嘗君)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많은 식객을 거느렸다.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을 말한다. 일두(一蠹)는 그의 호이고, 본관은 하동이다.
지피(持彼) 격구에서 막대기의 바깥 면으로 공을 끌어서 던지는 동작을 말한다. 원문에서는 지피(持彼)를 지피(持被)로 썼다.
회시(會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이 한양에 올라와서 보는 2차 시험을 말한다.
청번사령(請番使令) 청번은 당번이 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대신 번을 들기를 청하는 것을 말하며, 사령은 심부름꾼을 말한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