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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2월 1일 무신 [二月 初一日 戊申] 흐림.

근무를 끝내니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과 서정(西亭) 어른 및 이명구(李命求)가 찾아왔다. 소헌(韶軒)이 집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와서 기뻐하며 손을 잡았다. 그 인편에 경춘(景春)의 편지와 슬항(瑟項) 하성좌(河聖佐)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성존(聖存)의 위문하는 편지가 왔다. 교리(校理) 이종협(李鍾浹)의 편지가 왔다. 밤에 해사(海史)에게 갔다가 동촌(東村) 한동(漢洞)의 주서(注書) 차(車)씨를 아울러 만났다. 서정 어른과 객포(客浦)의 친척 이씨, 친구 박용서(朴龍緖)와 유성전(兪性全)이 찾아왔다.

2월 2일 기유 [初二日 己酉] 맑음.

소헌(韶軒)이 배를 타고 떠났다. 친구인 박용서(朴龍緖)가 찾아왔다. 이 진사와 흥규(興珪), 정언(正言) 만제(萬濟)와 교리 황회연(黃會淵), 친구 이복년(李復䄵)이 찾아왔다. 족형(族兄)인 감역(監役) 병제(秉濟)가 서울에 도착하여 찾아왔다. 밤에 남죽동(南竹洞)의 장신(將臣, 대장) 정낙용(鄭洛鎔)에게 가서 척족으로서의 오랜 정분을 풀었다. 상후(相厚)는 그의 아들이고, 병사(兵使) 주영(周榮)이 그의 부친이다. 돌아오는 길에 병사 이정규(李廷珪)를 찾아갔다. 교동(校洞)의 주사(主事) 최씨와 참의 이최영이 찾아왔다.

2월 3일 경술 [初三日 庚戌] 맑음.

객포(客浦)의 척족 이씨와 전적(典籍) 차(車)씨가 찾아왔다. 유성전(兪聖全)과 친구 신대영(申大永) 및 족질(族侄, 먼 친척 중에 조카뻘 되는 사람) 동협(東協, 駿元)이 찾아왔다. 판윤(判尹) 이씨의 편지가 왔고, 판동(板洞) 주서(注書)의 편지가 왔다. 언양(彦陽) 이규형(李奎衡)이 찾아왔다.

2월 4일 신해 [初四日 辛亥] 흐림.

사돈인 이명구(李命求)와 남포(藍浦)의 종인(宗人)이 호조 판서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해사(海史) 어른 처(妻)의 이종(姨從)이다. 친구 김사혁(金思赫)과 박용서(朴龍緖)가 찾아왔다. 잠시 원동(院洞)에 갔다.

2월 5일 임자 [初五日 壬子] 서리가 많이 내리고 맑았다.

족질(族侄)인 동선(東瑄)과 해사(海史) 어른, 도사(都事) 유병설(兪炳卨)과 친구인 김사혁(金思赫)이 찾아왔다. 이태원(李泰元)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용곡(龍谷)의 종씨(宗氏)인 도정 댁(都正宅)이 서울에 들어와서 찾아왔다. 밤에 판서(判書) 조동면(趙東冕), 먼 척족인 승지(承旨) 조동윤(趙東潤), 친구 함열(咸悅) 송주헌(宋周憲), 친구 진사 이흥규(李興珪), 사돈 이명구(李命求)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2월 6일 계축 [初六日 癸丑] 맑음.

족질(族侄)인 진사(進仕) 동필(東珌)이 서울에 들어와서 찾아왔다. 당진(唐津)의 이종(姨從)인 윤배구(尹培具)와 매부(妹夫) 이종백(李種百)이 왔다. 외종사촌인 정기현(鄭騏鉉) 씨가 서울에 도착하여 찾아왔다. 밤에 한동(漢洞)의 진사 조동식(趙東植)의 집에 갔다.

2월 7일 갑인 [初七日 甲寅] 맑음.

대전(大殿)의 진찬(進饌)에 참여하고 나서 입직(入直)을 하고 바로 따라서 올라갔다. 대전에서 수하(受賀, 하례를 받는 것)와 회작(會酌)을 하고 공손히 사찬(賜饌, 임금이 내려주는 음식)을 받았는데, 크게 1상이 차려져 있었다. 백관(百官)이 모두 참여하였다. 조정에서 알고 있는 사람을 모두 만났으나 기억할 수가 없다.

2월 8일 을묘 [初八日 乙卯] 밤에 비가 왔다.

동궁(東宮)의 탄신일이어서 새벽에 문안을 하였다. 동궁이 나이 30을 바라보고 책봉(冊封)된 지가 20년이 되었기 때문에 경사를 칭송해 하례를 받고 크게 사면(赦免)을 하였다.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들어가서 따라 올라가서 회작(會酌)을 하고 다시 사찬(賜饌)을 받았다. 어제와 오늘 이틀동안 상의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렀다. 백관(百官)들은 문관 · 음관(蔭官) · 무관(武官)으로 반열(班列)을 나누어 받았는데, 그 절차가 가지런하였다. 저녁에 다시 사찬을 하였다. 오늘 응제(應製)를 실시하여 내가 시관(試官)으로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갔다. 시장(試丈, 시험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은 조병세(趙秉世) 씨로 하도록 명하였다.

2월 9일 병진 [初九日 丙辰] 비가 왔다.

어제 과거 시험은 공무 때문에 미루다가 새벽에 고시(考試, 과거의 성적을 살펴 등수를 매기는 일)를 하여 밤 늦게서야 방문(榜文)을 내었다. 240여 명을 뽑았는데, 대과(大科) 9명이고 소과(小科)는 70여 명이었다. 동궁과 같은 해에 태어난 갑술생(甲戌生) 합격자들은 모두 올려서 진사(進士)로 삼았다. 밤에 다시 사찬(賜饌)을 하였다.

2월 10일 정사 [初十日 丁巳] 비가 왔다.

아침에 정원(政院, 승정원)에서 방목(榜目, 과거급제자 명부)을 쓰고 근무를 끝냈다.

2월 11일 무오[十一日 戊午] 흐림.

남단제(南壇祭)의 제관(祭官)으로 임명하는 첩지가 왔다. 하루 종일 손님을 만났으나 이루 다 기억할 수가 없다.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과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가 찾아왔다.

2월 12일 기미 [十二日 己未] 비가 왔다.

아침에 봉상시(奉常寺)에 가서 바람 · 구름 · 우레 · 비의 신(神)과 산천(山川)의 신 및 성황(城隍)의 신 등 삼위(三位)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남단(南壇)에 갔다. 밤에 돌아오다가 판서(判書) 송병서(宋秉瑞), 교리(校理) 이민하(李民夏), 주부(主簿) 장덕근(張德根), 도사(都事) 이승옥(李承玉)을 만났다.

2월 13일 경신 [十三日 庚申] 맑음.

하루 종일 손님이 찾아와 기억할 수가 없다. 저동(苧洞)의 선전관(宣傳官) 이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밤에 훈동(勳洞)의 판서 조동면(趙東冕), 재동(齋洞)의 판서 이건하(李乾夏) 씨와 그의 아들인 진사 범팔(範八)에게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족제(族弟) 면제(冕濟) 오산(梧山) 내간(內艱, 모친상) 9월.
주서(注書) 정순원(鄭淳元) 개평(介坪).
이호면(李浩冕) 계동(桂洞) 통훈대부 행 홍문관교리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동학교수 문신 겸 선전관(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東學敎授文臣兼宣傳官).
선전관(宣傳官) 이항로(李恒魯) 외간(外艱, 부친상).
이협여(李挾輿) 외간(外艱, 부친상) 명동(明洞)에 위문하는 편지를 부쳤다.
주사(主事) 이씨 장전(長田) 외간(外艱) 1월 28일.
무평(茂坪)의 송 진사(宋進士) 외간(外艱).
도사(都事) 송태현(宋台鉉) 외간(外艱).
승지(承旨) 김병년(金炳年) 내간(內艱).
이필하(李弼夏) 아산(牙山) 내간(內艱) 계사(癸巳, 1893년 1월).
함양참봉(咸陽參奉)이 제천(堤川) 어른을 낳아준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
승지 임탁호(任鐸鎬).
교리(校理) 신경선(申敬善) 내년 2월이 어머니 대상(大祥)이다. 화개동(花開洞)에 위문하는 편지를 부쳤다.
자리에서 물러난 완백(完伯, 전라감사) 6월에 외간(外艱) 민정식(閔正植).
교리 송태헌(宋台憲) 내간(內間).
병사(兵使) 이정규(李廷珪) 외간(外艱) 8월 일 돈장(敦丈).
세마 댁(洗馬宅, 세마는 世子翊衛司에 속한 정9품 벼슬) 내간(內艱) 오산(梧山).
죽기(竹基)의 경숙(敬叔) 씨 양아들 모친상 8월.
대교(待敎) 김석규(金錫圭) 내간(內間)이 정경(貞敬)부인이다.
이 판관(李判官) 명동(明洞).

주석
정낙용(鄭洛鎔)에게 가서 척족으로서의 오랜 정분을 풀었다 원문에 가평공(加平公) 배위 댁(配位宅)이라고 하였다. 배위 댁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었을 때 아내의 친정집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언양(彦陽) 이규형이 언양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이다.
이명구(李命求)에게 갔다가 본문에서 야동(夜洞)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가 않아 동(洞)을 왕(往)으로 풀었다. 2월 6일 기사에 그 용례가 있다.
진찬(進饌)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작고 의식이 간단한 궁중의 잔치를 말한다.
회작(會酌) 진연(進宴) 다음날에 베풀던 잔치를 말한다.
응제(應製) 임금의 명에 따라 시문(詩文)을 짓는 것을 말한다.
남단제(南壇祭) 오방 토룡제(五方土龍祭)를 지내던 제사의 하나이다. 남방을 맞은 적룡(赤龍)에게 지내던 제사를 말한다. 남단(南壇)은 남산의 남쪽 기슭에 있었다.
봉상시(奉常寺)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말한다.
돈장(敦丈) 공조 판서를 의미하는 돈장(敦匠)을 잘못 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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