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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3월 1일 무인 [三月 初一日 戊寅] 맑음.

정승조(鄭升朝)가 병으로 교대를 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억지로 근무를 그만두었다. 일식(日食)이 있었다.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 교리(校理) 이인규(李寅奎), 도사(都事) 유병설(兪炳卨), 재종 형제(再從 兄弟, 육촌 형제)인 민승규(閔升圭) · 민석규(閔錫圭)가 찾아왔다. 잠시 해사 댁(海史宅)에 갔다. 밤에 명동(明洞) 친구 이철용(李哲鎔)에게 갔고, 조카 동일(東鎰)이 진사가 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3월 2일 기묘 [初二日 己卯] 비가 왔다.

참봉(參奉) 이조승(李祖承)이 찾아왔다. 해사(海史) 어른과 친구 조동식(趙東植), 확재(確齋) 형제와 하태영(河泰永)이 찾아왔다. 동릉(東陵, 동구릉)으로 행차하실 때에 유도종사관(留都從事官)으로 임명하는 첩지가 왔다. 병조의 결속색리(結束色吏)총어영(摠禦營)의 기수(旗手)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유도대장(留都大將)은 판서 송병서(宋秉瑞)가 자신을 천거하였다.

3월 3일 경진 [初三日 庚辰] 흐림.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가 왔다. 오위장(五衛將) 이두현(李斗鉉)이 왔다. 하태영(河泰永)이 찾아왔고, 도사(都事) 유병설(兪炳卨)이 찾아왔다. 종인(宗人)으로 안동(安東)과 춘양(春陽)에 사는 진사 태제(泰濟)가 찾아왔다. 해사 댁(海史宅)에서 교리(校理) 이인규(李寅奎)를 만났는데, 옥서(玉署, 홍문관)의 직함에서 해임되었다.

3월 4일 신사 [初四日 辛巳] 맑음.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와 교리(校理) 이인규(李寅奎)가 찾아왔다. 정언(正言) 차(車)씨와 해사(海史)에게 갔다가 함께 광대가 서서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3월 5일 임오 [初五日 壬午] 맑음.

유도종사관(留都從事官)으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군사를 모집하여 대궐에 들어가 밤새도록 사방의 문을 적간(摘奸, 경계)하였다. 한가한 틈에 옥당(玉堂, 홍문관)에 가서 근무를 하고 있는 조영구(趙寧九) · 이재현(李載現)과 함께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3월 6일 계미 [初六日 癸未] 맑음.

동릉(東陵, 동구릉)에서 돌아올 때에 광화문(光化門)안에서 ≪백관이 임금을≫ 맞이하였다. 하루 종일 적간(摘奸)을 하고 궁(宮)에 돌아와서 ≪임금을≫ 맞이한 후에 ≪궁을≫ 나왔다.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 駿元은 그의 자인듯)와 족인(族人) 하태영(河泰永)이 찾아왔다. 판서(判書) 김병익(金炳翊)과 판서 송병서(宋秉瑞)와 하루 종일 감회를 나누었다. 승지(承旨) 이종원(李種元)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계방(桂坊, 세자익위사)을 지키고 있는 익찬(翊贊) 조규희(趙奎熙)에게 잠깐 갔다.

3월 7일 갑신 [初七日 甲申] 비가 왔다.

판서(判書) 송병서(宋秉瑞) 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잠시 해사 댁(海史宅)에 갔다.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 하태영(河泰永), 도사(都事) 유병설(兪炳卨), 확재(確齋)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있었다. 참판(參判)인 족형(族兄)이 교동(校洞)으로 이사를 가서 거리가 조금 멀어지니 서글프다.

3월 8일 을유 [初八日 乙酉] 비가 왔다.

기재(杞齋)에게 갔다가 오는 길에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를 찾아갔다. 마침 승지(承旨) 김덕수(金德洙), 승지 홍우상(洪祐相), 교리(校理) 이인규(李寅奎), 익찬 조규희(趙奎熙), 김태영(金泰永),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래서 함께 율시(律詩) 1수(首)를 짓고 하루 종일 있었다. 매우 취해 밤이 되어서 돌아왔다.

3월 9일 병술 [初九日 丙戌] 맑음.

참판 형님의 편지와 교리(校理) 조영구(趙寧九)의 편지가 왔다. 편지를 써서 고양(高陽)수령인 조용구(趙容九)에게 보냈다. 진사(進士) 조동식(趙東植)과 족숙(族叔)인 상면(商冕) 씨가 찾아왔다. 계산(桂山) 위에 가서 친구들과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3월 10일 정해 [初十日 丁亥] 맑음.

한동(漢洞)의 진사(進士) 이수봉(李秀鳳)에게 가서 밤새 광대의 소리를 들었다. 교리(校理) 심원익(沈遠翊), 선달(先達) 민영보(閔泳普), 수사(水使) 이규대(李奎大), 영장(營將) 구(具)씨와 함께 소리를 들었다.

3월 11일 무자 [十一日 戊子] 맑음.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 진사 조동식(趙東植), 교리(校理) 조영구(趙寧九)가 찾아왔다. 친구들과 함께 군자정(君子亭) · 몽답정(夢踏亭) · 괘궁정(掛弓亭) · 북일영(北一營)에 가서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3월 12일 기축 [十二日 己丑]

진사(進士) 이흥규(李興珪), 진사 이명구(李命求, 이번 봄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직각(直閣) 유진필(兪鎭弼), 교리(校理) 이인규(李寅奎), 척숙(戚叔)인 참봉(參奉) 송상진(宋相鎭) 씨, 확재(確齋)가 찾아왔다. 잠시 해사 댁(海史宅)과 승지(承旨) 유진필에게 갔다가 교리 유진찬(兪鎭贊), 교리 이인규, 교리 조영구(趙寧九)를 만나 감회를 나누었다. 떠날 때가 밤이었는데, 전동(典洞)의 주서(注書) 이오응(李五應)에게 갔다가 승지 이정직(李鼎稙)에게 들러 척숙인 승지 송종억(宋鍾億)을 만났다. 다시 금부(禁府, 의금부)에 가서 척조(戚祖, 성이 다른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인 이수은(李秀殷) 씨를 찾아뵈었는데, 영유(永柔)의 장계(狀啓) 때문에 파직되어 ≪금부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3월 13일 경인 [十三日 庚寅] 맑음.

울진(蔚珍)의 명제(命濟) 아들이 처음으로 ≪와서≫ 아침밥을 먹으러 갔다.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와 심호(心湖)가 찾아왔다. 판서 조병직(趙秉稷) 씨에게 가서 문병(問病)을 하고, 그의 아들인 익찬(翊贊) 규희(奎熙)에게 가서 떠날 때에 대화를 나누었다. 승지(承旨) 김덕수(金德洙)가 찾아왔다.

3월 14일 신묘 [十四日 辛卯] 비가 왔다.

해사 댁(海史宅)에 가서 친구들과 율시(律詩) 1수(首)를 짓고, 점심에 성찬(盛饌)을 먹었다. 감찰(監察) 유정수(柳廷秀)가 찾아왔다. 잠시 해사댁에 갔다. 족질(族侄)인 준원(駿元)이 찾아왔다. 밤에 영변(寧邊, 영변수령을 지냈다는 의미) 이근호(李根澔)에게 가서 고호(古湖)에서 헤어진 뒤에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3월 15일 임진 [十五日 壬辰] 흐림.

해사(海史)에게 가서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3월 16일 계사 [十六日 癸巳] 흐림.

준원(駿元)이 이별을 고하고 돌아갔다. 진사 이명구(李命求), 확재(確齋), 취○(醉○), 외종씨(外從氏, 외사촌 형), 서정(西亭) 어른이 찾아와서 하루 종일 한담(閑談)을 했다.

3월 17일 갑오 [十七日 甲午] 맑음.

친구들과 함께 남산(南山)의 복천정(福泉亭)에 가서 율시(律詩) 1수(首)를 짓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3월 18일 을미 [十八日 乙未] 맑음.

마우천(馬于天)이 아침에 찾아왔고, 해사(海史) 어른이 잠시 찾아왔다. 친구들과 군자정(君子亭)에 가서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3월 19일 병신 [十九日 丙申] 맑음.

영감 유필환(兪弼煥), 마우천(馬于天), 삼종형제인 길주(吉州)의 마선상(馬善相)이 ≪初試에 합격하였다≫ 찾아왔다. 좌랑(佐郞) 윤우선(尹寓善)과 해사(海史) 어른을 잠시 찾아갔다. 확재(確齋) 형제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놀았다. 밤에 동촌(東村)에 갔다.

3월 20일 정유 [二十日 丁酉] 맑음.

친구들과 몽답정(夢踏亭)에 가서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위양숙주(渭陽叔主, 외삼촌)가 서울에 왔는데, 홍주(洪州)의 이모댁과 당진(唐津)의 이모댁을 거쳐서 우리 집에 도착하였다. 그 행차에 집안의 무고한 소식을 들어 매우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63세의 노인이 가는 곳마다 남매간에 이별하여 슬픔이 많았을 것이다.

3월 21일 무술 [二十一日 戊戌] 맑음.

해사(海史) 어른과 신 교리(申校理) 어른 및 친구들과 함께 계산(桂山) 위에 올랐으나 세찬 바람에 방해를 받아 직조국(織造局)에 들어가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비빔밥[骨董飯]을 먹고 석양을 함께 구경하고 이 감찰(李監察), 유정수(柳廷秀), 송정(松亭)과 돌아왔다.

3월 22일 기해 [二十二日 己亥] 맑음.

친구들과 계산(桂山) 위에 올라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어(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 때문에 하대궐(下大闕, 경복궁)에서 수리를 하고 있었다. 어가(御駕, 임금의 가마)가 어제와 오늘 새 감역소(監役所, 공사를 감독하는 곳)에 왔었다.

3월 23일 경자 [二十三日 庚子] 맑음.

정언(正言) 차광현(車光炫)이 일찍 찾아와서 친구들과 맹현(孟峴)에 갔다. 잠시 정제(定濟) 씨 집에 갔다가 산꼭대기에 올라 상대궐(上大闕, 창덕궁)을 돌아보고 삼청동(三淸洞) 사이에서 쉬었다. 떠날 때에 주서(注書) 이정렬(李貞烈),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 척제(戚弟, 성이 다른 아우뻘 되는 일가)인 정 주부(鄭主簿), 송강(松江, 鄭澈의 호)의 종손인 추택(樞澤) 형제에게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유제(有濟) 씨, 신응선(申應善) 씨, 유필환(兪弼煥),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 승지 김덕수(金德洙)를 찾아가 보았다.

3월 24일 신축 [二十四日 辛丑] 흐림.

도사(都事) 유병설(兪炳卨)이 찾아왔다. 친구들과 함께 확재(確齋)에게 가서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3월 25일 임인 [二十五日 壬寅] 맑음.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과 참봉 어른 송상진(宋相鎭) 씨가 찾아왔다. 확재(確齋)형제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놀았다. 참봉(參奉) 이종린(李鍾獜)이 날마다 찾아왔다.

3월 26일 계묘 [二十六日 癸卯] 맑음.

친구들과 니현(泥峴, 배오개)에 갔는데, 일본인이 일개 마을을 이룬 곳이었다. 견줄 말한 것이 없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일본인 광대를 구경하고 다시 헤어졌다. 병조 정랑(兵曹 正郞)의 낙점을 받았다.

3월 27일 갑진 [二十七日 甲辰] 맑음.

친구들과 맹현(孟峴)에 가서 삼청동(三淸洞) 형제의 우물에 들렀다가 진사 김영학(金永學)과 참봉(參奉) 김영도(金永燾)를 만났다. 다시 영유(永柔)의 조동립(趙東立)과 친척인 진사 정순○(鄭淳○)에게 들러 돌아왔다. 친구 이철용(李喆鎔)과 족질(族侄)인 진사 동일(東鎰)이 밤에 찾아왔다.

3월 28일 을사 [二十八日 乙巳] 비가 왔다.

하루종일 충분히 위로가 되었고, 봄이 되어 기억할만한 날이었다. 진사 조동식(趙東植)이 비를 무릅쓰고 찾아왔다. 확재(確齋)도 찾아왔다.

3월 그믐 병오 [晦日 丙午] 맑음.

진사(進士) 신대영(申大永), 진사 이인협(李寅協), 진사 조동식(趙東植), 진사 이명구(李命九), 확재(確齋) 형제, 진사 동필(東珌), 조카 등과 함께 계산(桂山)에 올라 정상부근에서 쉬고 돌아왔다. 밤에 전동(典洞)에 가서 영유(永柔) ≪수령을 지낸≫ 척조(戚祖, 성이 다른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였다. 전동(磚洞) 민영소(閔泳韶) 대감에게 들렀다가 승지(承旨) 김경규(金敬圭), 승지 조길하(趙吉夏), 승지 정경원(鄭敬源), 사서(司書)인 족형(族兄), 참판 김명규(金明圭), 참판 김춘희(金春熙) 등을 만났다.

주석
결속색리(結束色吏) 병조에 속하여 임금이 대궐에 있을 때나 행차를 할 때에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아전을 말한다.
총어영(摠禦營) 친군영 가운데 별도로 둔 군영을 말한다. 1888년에 별영(別營)을 고친 것이다.
익찬(翊贊) 세자를 호위하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속한 정6품의 무관벼슬을 말한다.
광대의 소리 창성(倡聲) : 광대가 부르는 판소리를 말하는 듯하다.
선달(先達)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영장(營將) 각 진영(鎭營)의 최고 벼슬로 정3품이다.
직각(直閣) 규장각(奎章閣)에 소속된 정3품에서 종6품까지의 벼슬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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