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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4월 1일 정미 [四月 初一日 丁未] 흐림.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이 찾아와서 함께 병사(兵使) 이정규(李廷珪)에게 갔다. 곧 한동(漢洞)에 갔다가 돌아왔다. 진사 이흥규(李興珪)가 찾아왔다.

4월 2일 무신 [初二日 戊申] 비가 왔다.

진전(眞殿) 4실(四室)의 섭통례(攝通禮, 통례원에 속한 임시 벼슬)에 임명하는 첩지가 왔다. 날이 어두워져서 대축(大祝, 축문을 읽는 벼슬)으로 임명하는 첩지가 다시 왔다.

4월 3일 기유 [初三日 己酉] 오후에 맑음.

아침 일찍 비를 무릅쓰고 대궐에 들어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 임금의 벼슬 임명에 대한 인사)를 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정각에 신여(神輿, 종묘 제례시 신주를 모시던 가마)를 가지고 하궐(下闕, 경복궁)의 선전원(璿源殿)에 다시 모셨다. 바로 이어(移御)하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이 하루를 함께 했다.

4월 4일 경술 [初四日 庚戌] 흐리고 가랑비가 왔다.

확재(確齋)가 친구 조동식(趙東植)과 함께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놀았다.

4월 5일 신해 [初五日 辛亥] 맑음.

친구 이복년(李復年)과 조 진사(趙進士), 해사(海史) 어른과 평택(平澤) 조영원(趙榮元) 및 이종린(李鍾獜)이 찾아왔다. 파주(坡州) 대원리(大院里)의 송무산(宋茂山)이 왔다가 갔다. 친구들과 밤에 거리를 걸었다. 상노(床奴) 김만길(金萬吉)이 들어왔다.

4월 6일 임자 [初六日 壬子] 흐림.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의 편지가 왔다. 평택(平澤) 조영원(趙榮元), 진사 임보준(任溥準), 이명구(李命求), 진사 조동식(趙東植)이 찾아왔다. 밤에 해사(海史) 어른에게 갔다.
동학이류(東學異類)가 3월 봄부터 다시 일어나서 지난봄보다 심해졌다. 금산읍(錦山邑)에서 접전을 하여 서로 간에 죽은 자가 제법 많았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는 민요(民擾, 민란)가 크게 일어나서 그 읍 수령인 조병갑(趙秉甲)이 한없는 곤경을 겪고 달아났다. 또한 여러 읍에서 이요(吏擾, 아전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동소(東搔, 동학의 소요) · 이요(吏擾) · 민요(民擾) 3가지가 합하여 난리를 야기하였다. 부안(扶安) 일개 읍에서는 성(城)을 무너뜨리고 그 군기(軍器)를 빼앗았으며, 수령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의 무리가 점점 늘어나서 몇 만이 되었고 한창 농사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나주(羅州)목사는 선정을 펼친 수령이나 명확한 판결 때문에 아전들이 난리를 일으켜 도망가기에 이르렀는데, 그의 며느리와 손자 형제 3명을 아전들이 잡고 있다고 한다. 덕산(德山)의 김병완(金炳琬)은 예측할 수 없는 민요를 만나 맞아서 몸이 많이 다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충청좌도(忠淸左道) 전체와 전라우도(全羅右道)의 사대부들이 모두 모욕을 받은 것이 끝이 없었다. 서양의 학문이 점점 심해져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남의 무덤을 파헤쳐서 지방의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들 중에 모욕을 받지 않음이 없었다. 서울도 재상들이 종종 상천배(常賤輩, 평민과 천인)에게 모욕을 받아 사람들이 모두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평안도와 전라도는 민요(民擾)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13일에 능행(陵行)이 이것 때문에 미루어질 듯하다. 병사(兵使) 홍기훈(洪岐薰, 이전 이름은 在熙이다)이 초토사(招討使)로 병사 600명을 이끌고 호남에 가서 강진 병사(康津兵使)를 겸임하였다.

4월 7일 계축 [初七日 癸丑] 흐림.

서산(瑞山) 윤 진사, 평택(平澤) 조영원(趙榮元), 참봉(參奉) 이종린(李鍾獜), 조동식(趙東植), 종인(宗人)인 참봉 성제(性濟), 조천식(趙天植), 친척인 찰방(察訪) 이수훈(李秀薰), 확재(確齋) 형제가 찾아왔다.

4월 8일 갑인 [浴佛日 甲寅] 비가 왔다.

공주(公州) 정계(晶溪)의 동상(東床, 사위) 내외 편지가 와서 안부를 전해 듣고 매우 기쁘고 상쾌했다.
진잠(鎭岑)에서 평민 수천 명이 이유 없이 무리를 모아 동학이류(東學異類) 놈들의 집 수십 채를 불태워서 그 근심도 가벼운 것이 아니다. 서산(瑞山) 서북면(西北面)에도 동소(東搔)가 있어 양반집이 모욕을 겪을까 깊이 걱정하기에 이르렀으나 평소 향촌(鄕村)에서 불선(不善)한 자들이 대개 욕을 당하였다. 우리 집은 인심을 얻은 것을 위주로 하여 비록 걱정은 없었으나 상민의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려워서 이것 때문에 걱정하였다. 외종(外從)형님인 기현(騏鉉) 씨가 몇 달 전에 와서 머물렀으나 그의 집 근처가 소란하다고 하여 갑자기 이별하니 매우 서글펐다. 마치 난리 중에 서로 이별하는 듯하다. 친구들과 오후에 나란히 남쪽 관황묘(關皇廟)에 갔다가 밤에 오는 길에 참의(參議) 민형식(閔馨植)에게 들렀다. 명동(明洞)의 족질(族侄)인 진사 동일(東鎰)에게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4월 9일 을묘 [初九日 乙卯] 맑음.

금사(錦史) 영서(永瑞)가 말하기를, “같은 종씨(宗氏)로 같은 집에서 6~7년을 살다가 병이든 지 2년이 되는 오늘 진시(辰時, 아침 7시~9시)에 죽으니 매우 참담합니다. 이 사람은 집도 촌수가 가까운 친척도 없어 당일 장례를 치러 수구문(水口門) 밖에 묻었습니다. 밤에 해사(海史) 어른의 집에서 묵었습니다. 오두막집에서 상(喪)이 나니 문상객들이 모두 묵을 곳이 없어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늘은 진사(進士)의 창방일(唱榜日)이다. 진사 강몽석(姜夢錫)과 유 청양(兪靑陽)의 진사(進士) 아들이 찾아왔다.

4월 10일 병진 [初十日 丙辰] 흐림.

해사(海史) 어른과 조동식(趙東植) 및 확재(確齋) 형제가 놀러왔다. 이명구(李命求)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이별을 하러왔다. 소헌(韶軒)편에 집의 안부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했다. 고향집에서 보내온 물건이 제대로 도착했다. 동상(東床)에게 답장을 썼다.

4월 11일 정사 [十一日 丁巳] 맑음.

친구 민○규(閔○圭)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이별을 하러왔다. 참봉(參奉) 이조승(李祖承) 씨가 찾아왔다. 청양(靑陽)의 종인(宗人)이 찾아왔다. 해사 댁(海史宅), 송정(松亭), 감찰(監察) 유정수(柳廷秀),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 고창(高敞) 김사준(金思準)에게 갔으나 모두 만나지 못했다. 친구 이호면(李浩冕)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동소(東搔, 동학의 소요)가 다시 충청도에서 일어났다. 충청도와 전라도 2개 도에서 전보(電報)가 날마다 왔다. 금구(金溝)에서 접전을 하여 죽은 자가 많아 근심이 적지 않다.

4월 12일 무오 [十二日 戊午] 맑음.

친구 이주승(李周承), 친구 김사○(金思○)이 찾아왔다. 창동(昌洞)의 진사(進士) 동필(東珌)이 2월 초에 와서 머물렀다. 이 사람은 친족 중에서 가장 아꼈는데, 고향에 내려간다고 이별을 하였다. 청기(靑綺)와 풍기(豊基)에 사는 금서현(琴瑞鉉)은 6년 동안 객지생활을 하였다. 지금 같은 세상에 문장(文章)이 뛰어나나 ≪자리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 이들이 이별을 하러오니 슬픈 마음에 2사람이 단잠을 잘 수 없었다. 소헌(韶軒) 한성교(韓成敎)가 강(江)에서 들어오니 감회가 은근하였다. 진사 송병철(宋秉喆)이 찾아왔다. 진사 김영학(金永學)이 찾아왔다.

4월 13일 기미 [十三日 己未] 맑음.

외숙(外叔)이 서울에 몇 달을 머무르셨는데, 밤낮으로 모시고 다녔다. 오늘 아침에 고향에 내려가시기에 송별인사를 하였다. 63세의 노인이 어수선한 때에 이별하니 슬픔이 더욱 많았다. 소헌(韶軒)이 강에 나갔다. 같은 마을의 직부(直赴) 안종화(安鍾和),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 친구 김사○(金思○), 위수(衛率) 조규희(趙奎熙), 확재(確齋)에게 가서 시간을 보냈다. 밤에 병사(兵使) 이정규(李廷珪), 청양(靑陽) 유치흥(兪致興)에게 갔다.

4월 14일 경신 [十四日 庚申] 맑음.

평택(平澤) 조영원(趙榮元)이 고향에 내려간다고 이별을 하러 왔다.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소헌(韶軒)이 배로 돌아가는 편에 부쳤다. 추곡(秋谷)에 편지를 써서 창동(昌洞)편에 부쳤다. 잠시 확재(確齋)에게 갔다. 판서 김만식(金晩植) 씨, 진사 구필서(具弼書), 사서(司書)인 족형(族兄), 겸사서(兼司書)인 신응선(申應善) 씨, 판서 이건하(李乾夏) 씨에게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아들인 진사 사범(士範)과 감회를 나누었다. 도사(都事) 김용기(金龍基)에게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도사 유병설(兪炳卨), 교리(校理) 조영구(趙寧九)에게 들렀다. 밤에 승지(承旨) 서병선(徐丙善)과 교리 이범찬(李範贊)에게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고금도(古今島) 주인(主人) 오창수(吳昌壽)가 1,000리 길을 멀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나를 보러 왔다. 그 뜻이 가상할만하나 올 때에 도적을 만나 의관(衣冠)을 잃어 버려 괴로움을 당했다. 진사 윤시영(尹時榮)이 찾아왔다.

4월 15일 신유 [十五日 辛酉] 맑음.

확재(確齋)와 진사(進士) 신대영(申大永), 친구 이주승(李周承)과 유영로(柳永魯)가 찾아와서 한담(閑談)을 하였다. 진사 이흥규(李興珪)와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이 찾아왔다. 밤에 판서 조동면(趙東冕), 주서(注書) 이오응(李五應) 씨, 인천(仁川) 어른인 상덕(商德) 씨에게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4월 16일 임술 [十六日 壬戌] 맑음.

익찬(翊贊) 조규희(趙奎熙)와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에게 갔다. 확재(確齋)가 놀러왔다.

4월 17일 계해 [十七日 癸亥] 비가 왔다.

확재(確齋)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한담(閑談)을 하여 적적하지 않았다. 죽리(竹里)의 명륜(明倫) 동생이 배를 타고 왔다.

4월 18일 갑자 [十八日 甲子] 흐림.

서정(西亭) 어른과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이 찾아와서 함께 병사(兵使) 이정규(李廷珪)에게 갔다. 오는 길에 유 청양(兪靑陽), 친구 김사찬(金思燦),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를 찾아갔다. 교리(校理) 유진찬(兪鎭贊)이 찾아왔다. 밤에 판서 민영소(閔泳韶)에게 갔다가 교리 박희용(朴喜容)과 교리 이재현(李載現)에게 들렀다. 길에서 교리 김근연(金近淵)과 사서(司書)인 족형(族兄)을 만났다. 금현(琴峴)의 장경환(張瓊煥)이 왔다.

4월 19일 을축 [十九日 乙丑] 맑음.

진사(進士) 조동식(趙東植), 친구 이주승(李周承),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이 찾아왔다. 교리(校理) 신응선(申應善) 씨와 영감 유필환(兪弼煥) 씨가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위해 정오(正午, 낮 12시)에 찾아왔다. 밤에 판서 조동면(趙東冕), 숙천(肅川) 민일호(閔一鎬), 진사 이흥규(李興珪), 친구 김유증(金裕曾)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족제(族弟, 같은 항렬의 아우뻘 되는 먼 친척)인 천제(天濟)가 유숙(留宿)하러 왔다.

4월 20일 병인 [二十日 丙寅] 맑음.

잠시 확재(確齋)에게 갔다. 판서 조병직(趙秉稷) 씨와 그의 아들 규희(奎熙),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과 직부(直赴) 안종화(安鍾和)에게 갔다. 밤에 원동(院洞)의 판서 김윤식(金允植) 씨와 그의 아들 유증(裕曾)에게 갔다. 주사(主事) 박준양(朴準陽)과 육 주사(陸主事)가 찾아왔다. 3일제(三日製)를 시행하였다. 역적 옥균(玉均, 김옥균)을 홍종우(洪鍾宇)가 잡아온 일로 대과(大科)를 시행하였다. 판윤(判尹) 이유인(李裕寅)과 진사 이규환(李圭桓)의 편지가 왔다.

4월 21일 정묘 [二十一日 丁卯] 맑음.

확재(確齋)가 놀러왔다. 최영구(崔永九)와 남문(南門) 밖의 ○○가 찾아왔다. 김사찬(金思燦)이 찾아왔다. 잠시 확재에게 갔다. 친군 총어영(親軍摠禦營)의 낭청(郎廳)과 군사마(軍司馬) 망통(望筩)이 왔다. 필산(筆山)의 편지와 기재(杞齋)의 편지를 하(河)씨의 일 때문에 어음원동(魚音院洞)에 보냈다. 밤에 참판인 오춘군(鰲春君) 이주영(李周榮)과 그의 아들 규환(圭桓)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4월 22일 무진 [二十二日 戊辰] 맑음.

진사(進士) 조동식(趙東植)과 진사 이흥규(李興珪) 및 정 선달(鄭先達)이 찾아왔다. 해사(海史) 어른이 찾아왔다. 공주(公州)의 이씨 집에 편지를 부쳤다. 죽리(竹里)의 김영걸(金英傑)이 오는 편에 집의 안부 편지를 받았다.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이 찾아와서 함께 중동(中洞)에 갔다. 총어영 낭청(摠禦營 郎廳)의 낙점을 받아 영문(營門)의 서리(書吏)와 별배(別陪, 하인) 및 구종(驅從, 관리를 모시고 따라다니는 하인) 7~8명이 찾아왔다.

4월 23일 기사 [二十三日 己巳] 맑음.

숙배단자(肅拜單子, 임금께 인사를 올리는 글)를 올렸다. 교리(校理) 유진찬(兪鎭贊)에게 갔다.

4월 24일 경오 [二十四日 庚午] 맑음.

새벽녘에 영문(營門)의 하예(下隷)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궐에 가서 임금의 은혜에 사례(謝禮)를 하고 옥당(玉堂, 홍문관)에 들어가서 교리 이종협(李鍾浹), 교리 심계택(沈啓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사또 댁(使道宅)인 장신(將臣, 대장) 한규설(韓圭卨)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영변(寧邊) 이근호(李根澔)에게 들렀다. 병사(兵使) 이정규(李廷珪)가 선천(宣川)에 가게 되어 작별을 하였다. 확재(確齋)가 밤에 찾아와서 한담(閑談)을 하였다.

4월 25일 신미 [二十五日 辛未] 맑음.

고호(古湖)의 오창수(吳昌壽)가 강에 나갔다. 이 달 초에 백치(栢峙)의 과부인 재종형수가 죽어 매우 참담하였다. 팔순의 종조모(從祖母) 심경은 더욱 괴로울 것이다. 재종형수가 재종인 홍제(洪濟)에게 시집을 와서 우례(于禮)를 치루지 못하고 2년 만에 재종형이 29세에 요절(夭折)하였다. 종숙(從叔) 내외분은 이미 5~6년 전에 돌아가셔서 종조모는 우리 집에 계셨고, ≪재종 형수는≫ 추곡(秋谷)의 종숙 집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하고 백치의 본가에서 죽어 더욱 참담하였다. 울진(蔚珍)의 명제(命濟)가 고향에서 보러왔다. 상면(商冕) 씨가 찾아왔다. 일차전강(日次殿講)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친히 행차하신 날이었다.

4월 26일 임신 [二十六日 壬申]

확재(確齋)와 상면(商冕) 씨 및 부평(富平)의 종인(宗人)이 찾아왔다. 예릉(睿陵, 哲宗과 哲仁王后 김씨의 능)의 단오제(端午祭)의 제관(祭官)으로 임명하는 첩지가 왔다.
세자궁의 단오첩(端午帖)이 와서 7언 율시(律詩)와 7언 절구(絶句), 5언 율시와 5언 절구 등 4수(首)를 지어 바쳤다. 교리(校理) 유진찬(兪鎭贊)이 찾아왔다. 직각(直閣) 유진필(兪鎭弼)에게 갔다. 밤에 전동(典洞)의 척조(戚祖) 부자(父子)분께 갔다. 진외가댁이 양주(楊洲)로 이사를 갔는데, 오늘 오랫동안 사귀던 주서(注書) 오응(五應) 씨가 먼저 떠나갔다. 성(城)안에 함께 살다가 갑자기 헤어지니 매우 슬펐다. 교리 이재현(李載現)에게 들렀다가 돌아왔다.

4월 27일 계유 [二十七日 癸酉] 맑음.

부평(富平)의 종인(宗人)이 찾아왔다. 오늘은 진하(陳賀, 경사가 있을 때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는 일)하는 날이다. 3일제의 급제와 홍종우(洪鍾宇)가 10년 동안 일본에서 온갖 풍상(風霜)을 겪고 대역죄인(大逆罪人) 옥균(玉均, 김옥균)을 잡아와서 오늘 진하를 할 뿐이었다. 남문(南門) 밖의 오 서방(吳書房)과 친구 김사찬(金思燦) 및 확재(確齋)가 놀러왔다. 승지(承旨) 홍우상(洪祐相)과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에게 갔다. 확재가 이웃으로 이사를 가서 보러갔다. 남소(南搔, 남쪽의 소요)가 더욱 심해져서 도백(道伯, 감사)을 가려서 뽑았는데, 완백(完伯, 전라감사)으로 판서 김학진(金鶴鎭)을, 금백(錦伯, 충청감사)으로 판서 이헌영(李永)을, 영백(嶺伯, 경상감사)으로 판서 조병호(趙秉鎬)를 택하였다.

4월 28일 갑술 [二十八日 甲戌] 맑음.

남쪽의 소요로 판윤(判尹) 이원회(李元會)가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로, 참판(參判) 엄세영(嚴世永)이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로 차출되었다. 호남에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을 다시 내렸다. 각 항목의 수세(收稅)를 혁파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낱낱이 등문(登聞, 중요한 사실이나 사건을 임금에게 알리는 것)하라는 조령(朝令)이 엄중하였다. 안동(安東)에 사는 진사(進士)인 종인(宗人)이 찾아왔다.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가 찾아왔다. 소헌(韶軒) 어른이 들어왔다. 해사(海史) 어른과 친구 김사찬(金思燦) 및 족제(族弟)인 천제(天濟)가 찾아왔다.

4월 29일 을해 [二十九日 乙亥] 흐림.

확재(確齋)에게 갔다가 좌랑(佐郞) 윤우선(尹寓善)과 진사 신대영(申大永)을 만났다. 오후에 재동(齋洞)의 판서(判書) 이건하(李乾夏) 씨에게 가서 그의 아들인 진사 범팔(範八)이 경릉참봉(景陵參奉, 헌종과 효헌왕후 김씨 및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 된 것을 축하하였다. 사서(司書)인 유제(有濟) 씨 집과 교리(校理) 신응선(申應善) 씨에게 들렀다가 친구 신공수(申公壽)를 만났다.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이 찾아왔다.
전라도의 소요가 크게 일어나서 전주부(全州府)에 침입하여 감사와 본관(本官)이 모두 도망가고, 서기영(西箕營, 평양감영)의 병사 500명이 내려가기에 이르렀다. 전후 2차례에 걸쳐 내려간 병사가 수천이나 한 번도 접전을 하지 않아서 그 무리가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그래서 임금의 걱정이 한층 깊어져 매우 근심스럽다.

4월 30일 병자 [三十日 丙子] 맑음.

단오첩(端午帖) 17장을 써서 바쳤다. 확재(確齋)와 진사 조동식(趙東植),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과 정선달(鄭先達)이 찾아왔다. 신천(申天)에 주서(注書) 이정렬(李貞烈)에게 갔다가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과 부수(副率) 이○렬(李○烈)하고 대화를 하였다. 위수(衛率) 조규희(趙奎熙)에게 들렀다가, 길에서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과 승지(承旨) 김덕수(金德洙) 및 참봉(參奉) 박후진(朴厚鎭)을 만났다.

주석
진전(眞殿) 선원전(璿源殿)이나, 궁궐 안에 역대 임금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상노(床奴) 밥상을 나르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어린 아이를 말한다.
浴佛日 욕불일(浴佛日) : 음력 4월 8일을 가리킨다. 부처상을 목욕하는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관황묘(關皇廟)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창방일(唱榜日) 방목(榜目)에 적힌 과거급제자의 이름을 부르는 날을 말한다.
직부(直赴) 과거에 합격하고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위수(衛率)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딸린 종6품의 무관 벼슬로 세자의 시위와 배종을 맡았다.
3일제(三日製)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로 음력 초사흗날에 보던 과거시험을 말한다.
홍종우(洪鍾宇) 1854~?. 김옥균을 상해(上海)로 유인하여 암살하고,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저지한 인물이다.
대과(大科) 과거의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소과(小科)에 상대하여 부르는 말이다.
군사마(軍司馬) 친군영에 속하여 기마(騎馬)의 일을 맡아보던 무관 벼슬을 말한다.
망통(望筩) 망단자. 삼망(三望, 추천 후보의 명단)의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우례(于禮) 신부가 처음 시댁으로 들어가는 예식을 말한다.
일차전강(日次殿講) 경서(經書)의 강독을 권장하기 위하여 실시하던 시험이다. 성균관 유생 중에 실력이 출중한 사람을 임금이 대궐에 모아놓고 찌를 뽑아서 외우게 하던 시험을 말한다.
단오첩(端午帖) 단옷날에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린 시를 기록한 첩을 말한다.
본관(本官) 감사나 병사(兵使)가 있는 곳의 목사(牧使)·판관(判官)·부윤(府尹)을 말한다.
신천(申天) 신시(申時, 오후 3시~5시)를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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