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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5월 1일 정축 [五月 吉日 丁丑] 맑음.

김영대(金永大)가 보러왔다. 인천(仁川)에 편지를 썼다. 족제(族弟)인 천제(天濟)가 찾아와서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 감찰(監察) 유정수(柳廷秀), 주사(主事)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조규희(趙奎熙)에게 갔다.

5월 2일 무인 [初二日 戊寅] 맑음.

정 선달(鄭先達)과 조 진사(趙進士) 및 차 정언(車正言)이 왔다. 직각(直閣) 유진필(兪鎭弼)과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에게 갔다. 밤에 영변(寧邊) 이근호(李根澔)와 족질(族姪) 동일(東鎰) 및 친구 이철용(李喆鎔)에게 갔다.

5월 3일 기묘 [初三日 己卯] 맑음.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와 종인(宗人)인 진사(進士) 태제(泰濟) 및 친구들이 놀러왔다.

5월 4일 경진 [初四日 庚辰] 맑음.

밥을 먹은 뒤에 노새를 타고 하인 4명을 데리고 예릉(睿陵)에 갔다. 차 정언(車正言)과 승지(承旨) 태제(台濟) 씨에게 들렀다가 길에서 헌관(獻官)인 참판(參判) 민영주(閔泳柱)를 만났다. 평소에 친분이 있어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홍제원(紅堤院)의 점막(店幕)에서 승지 서병선(徐丙善)과 교리(校理) 김근연(金近淵)을 만났다. 신천(申天, 신시)에 능(陵)의 재실(齋室)에 도착하여 향역(享役, 제사)을 무사히 끝내고 유숙(留宿)하였다. 참봉(參奉) 이완용(李完鎔)이 이근홍(李根弘)에게 밤늦게까지 한가롭게 대화를 하게 하였다.

5월 5일 신사 [初五日 辛巳] 맑음.

아침 일찍 대자동(大慈洞)의 산지기집에 가서 3분의 산소에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평신읍(平薪邑)에 사는 김상희(金商熙, 字는 夢汝)는 서로 간에 3대동안 같은 집안사람인데, 유숙하러 와서 집안의 안부편지를 전하였다.

5월 6일 임오 [初六日 壬午] 맑음.

전주(全州)의 시끄럽게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접전을 하여 저들 500명을 해쳐 해산했다고 하여 다행스럽다. 그러나 청국 병사 2,000명을 요청하였는데, 아산(牙山)에 정박하여 포구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확재(確齋)와 조 진사(趙進士)가 놀러왔다. 오후에 비에 묶여서 소헌(韶軒)이 강에서 들어왔다.

5월 7일 계미 [初七日 癸未] 비가 왔다.

잠시 해사 댁(海史宅)에 가서 조 진사(趙進士)와 소헌(韶軒)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몽여(夢汝)가 다시 들어왔다.

5월 8일 갑신 [初八日 甲申] 흐림.

몽여(夢汝)와 소헌(韶軒)이 동시에 떠났고 그 인편에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조 판서(趙判書), 김 주부(金主簿), 김 주서(金注書), 유 감찰(柳監察) 집에 갔다가 돌아와서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다.

5월 9일 을유 [初九日 乙酉] 맑음.

반주인(泮主人) 안(安)씨 노인이 보러왔다. 재동(齋洞)의 여러 곳에 갔다가 돌아왔다.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에 초토사(招討使)의 전보에 의하면, 전주부의 성(城)을 회복하고 평민이 많이 다쳤다고 한다. 일본군 수백 명이 이유 없이 도성에 들어와서 민심이 어수선하고, 청국 군이 아산읍(牙山邑)에 내려 군량을 운송하는 폐단과 농우(農牛)를 빼앗겨 생업을 잃어버렸다고 하니 근심스럽다. 간동(諫洞)에 갔다.

5월 10일 병술 [初十日 丙戌] 흐림.

증조부(曾祖父)의 제사에 멀어서 참석하지 못하니 그리움이 더욱 깊었다. 조 진사(趙進士)와 권 도사(權都事)가 찾아왔다. 한동(漢洞)에 갔다.

5월 11일 정해 [十一日 丁亥] 비가 왔다.

빗속에 예릉(睿陵)으로 출발하여 큰비를 무릅쓰고 제사를 지낸 뒤에 재실(齋室)에서 묵었다.

5월 12일 무자 [十二日 戊子] 큰비가 왔다.

큰비를 무릅쓰고 헌관(獻官)인 참판 조병필(趙秉弼)과 각신(閣臣, 규장각의 관리)인 승지(承旨) 이용선(李容善) 및 참봉(參奉) 이완용(李完鎔)과 짝을 지어 여현점(勵峴店)에 이르렀다. 신시(申時) 정각에 마을의 장정 30명을 세워 가마를 부축하여 ≪물을≫ 건넜다. 매우 위태롭고 두려웠다.

5월 13일 기축 [十三日 己丑] 흐리고 눅눅했다.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 주사(主事) 박두양(朴斗陽), 선전관(宣傳官) 조동시(趙東始), 진사(進士) 신대영(申大永), 확재(確齋)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놀았다. 밤에 해사(海史) 어른에게 갔다.

5월 14일 경인 [十四日 庚寅] 흐리고 눅눅하며 비가 왔다.

승정원의 시패(試牌)가 나왔는데, 3망(三望)에 이민하(李民夏) · 이범홍(李範弘) · 김약제(金若濟)가 있었다. 시패를 받아 승정원에 들어가서 옥당에 이르렀다. 승지(承旨) 유진필(兪鎭弼)과 교리(校理) 유진찬(兪鎭贊) 형제, 교리 한흥교(韓興敎)와 교리 이범홍, 승지 송언회(宋彦會)와 승지 정우묵(鄭佑黙), 승지 김덕수(金德洙)와 교리 윤덕영(尹德榮)과 옥당에 들어갔다. 조범구(趙範九)와 송태헌(宋台憲)과는 평소에 절친하였는데, 밤에 마침 만나서 계속 이어져 밤을 샜다. 축시(丑時) 정각(正刻, 오전 2시)에 말망(末望)에 낙점을 받고 동이 터서야 나왔다.

5월 15일 신묘 [十五日 辛卯] 흐림.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전시(殿試)에 대독관(對讀官)으로 춘당대(春塘臺)에 들어갔다. 비가 올 형세가 점점 대단해졌고, 판서 김성근(金聲根)을 명관(命官)으로 삼았다. 다만 도령(都令) 김명규(金明圭), 참판 조정희(趙定熙), 참판 김학수(金鶴洙), 승지(承旨) 이무로(李茂魯), 승지 이근교(李根敎), 교리(校理) 윤덕영(尹德榮), 교리 이교영(李喬榮), 교리 송태헌(宋台憲)과 내린 비가 금대(禁臺)에 밤새 쌓이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御題, 임금이 시험에 낸 제목)는 원득충효(願得忠孝)였는데, 장원(壯元)은 부(賦)가 차지하였다. 진사 주일(周一)의 편지가 왔다.

5월 16일 임진 [十六日 壬辰] 비가 왔다.

아침에 시역(試役, 과거시험에 관한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비로 담장이 무너졌다. 먼젓번의 향역(享役, 단오제 제사)과 이번의 시역(試役)에도 장복(章服, 관복)을 입었다. 두 가지 일을 마쳤다.

5월 17일 계사 [十七日 癸巳] 흐림.

일본 병사 1,000여 명이 별 어려움 없이 성(城)에 들어왔고, 게다가 밤을 무릅쓰고 성을 넘어 들어왔다는 소문이 크게 일어 피난하는 자가 허다하였다. 곡물 값이 갑자기 뛰었다. 남요(南擾, 남쪽의 소요)가 겨우 진정되었는데, 왜요(倭擾, 일본인의 소요)가 이와 같아 인심이 안정될는지 모르겠다. 걱정스럽다. 친구들이 찾아왔다.

5월 18일 갑오 [十八日 甲午] 맑음.

풍양(豊壤)의 진사(進士) 이공일(李公一)이 찾아왔다. 교리(校理) 조영구(趙寧九, 字는 國卿)가 찾아왔다. 해사(海史)에게 갔다. 확재(確齋)가 밤에 찾아왔다. 조동시(趙東始)가 찾아왔다.

5월 19일 을미 [十九日 乙未]

장마 비가 이미 지루하였다. 밤에 학질기운이 있어 밤새 매우 아팠다.

5월 20일 병신 [二十日 丙申] 흐림.

신응선(申應善) 씨와 진사 동일(東鎰)이 찾아왔다. 오위장(五衛將) 이두현(李斗鉉)이 찾아왔다.

5월 21일 정유 [二十一日 丁酉] 맑음.

훈동(勳洞)의 대신(大臣)인 홍집(弘集, 김홍집) 씨, 참봉(參奉) 이완용(李完鎔), 참판(參判) 민영주(閔泳柱), 참판 이경직(李耕稙), 척숙(戚叔)인 승지(承旨) 송종억(宋鍾億), 참판 이주영(李周榮), 선달(先達) 이○영(李○永), 판윤(判尹) 이유인(李裕寅)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5월 22일 무술 [二十二日 戊戌] 맑고 매우 더웠다.

친구들이 찾아왔다. 판서 조병직(趙秉稷) 씨와 그의 아들 규희(奎熙)에게 갔다가 유제(有濟) 씨와 참봉(參奉) 장○렬(張○烈) 및 위수(衛率) 이○렬(李○烈)을 만났다.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에게 들렀다가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과 감찰(監察) 유정수(柳廷秀)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떠날 때 일본 군 몇 천 명이 만리창(萬里倉) 아래 주둔하여 인심이 점점 변하니 근심스러웠다. 밤에 승지(承旨) 태제(台濟) 씨에게 갔다.

5월 23일 기해 [二十三日 己亥] 맑고 더웠다.

해사(海史)에게 가서 떡을 먹었다. 창동(昌洞)의 진사(進士)가 하인을 보내왔다. 일본군[倭兵] 수백 명이 다시 동대문(東大門) 밖에 주둔하여 인심이 흉흉하여 진정되지 않았다. 안동(安東)의 종인(宗人)인 태제(泰濟)가 찾아왔다.

5월 24일 경자 [二十四日 庚子] 맑고 더웠다.

진사(進士) 송병철(宋秉喆)이 찾아와서 함께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에게 갔다가 율시(律詩) 1수(首)와 절구(絶句) 6수를 지었다. 익찬(翊贊) 조규희(趙奎熙)의 편지가 왔다.

5월 25일 신축 [二十五日 辛丑] 맑음.

이 판윤(李判尹)과 유 청양(兪靑陽) 및 교리(校理) 이필용(李弼鎔)에게 가서 한담(閑談)을 나누었다.

5월 26일 임인 [二十六日 壬寅] 맑고 밤에 비가 왔다.

금사(錦史)가 떠난 뒤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이에 집을 팔고 오늘 원래 살던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일본군[倭兵]의 수가 날로 증가되어 인심이 불안해지니 매우 답답하고 걱정스럽다.

5월 27일 계묘 [二十七日 癸卯] 흐림.

피난을 하는 자들이 많아서 장안(長安, 서울)이 반쯤 비는 데에 이르렀다. 수실(壽室)을 보내려고 했으나 돈을 구할 길이 아주 막혀서 근심스럽고 답답할 뿐이다. 주서(注書) 안종화(安鍾和)와 종인(宗人)인 진사(進士) 태제(泰濟)가 찾아왔다. 필산(筆山)이 노자(路子, 여비) 100꾸러미를 보내와서 매우 고마웠다. 주사(主事) 최영하(崔榮夏)가 찾아왔다.

5월 28일 갑진 [二十八日 甲辰] 흐림.

왜요(倭擾)가 점점 커져서 장사를 하러 온 화인(華人, 중국인)이 모두 떠나갔다. 도성안의 인심이 들끓어서 어쩔 수 없이 수실(壽室)을 보냈다. 확재(確齋)가 그 서모(庶母)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는 편에 함께 딸려 보냈다. 확재의 성의(盛誼)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방책이 없어 난리를 기다릴 뿐이었으나 확재는 가마꾼을 준비하고 치송(治送, 짐을 꾸려 길을 떠나보내는 것)을 강력히 권유하였다. 더욱이 무더위에 수백리 길을 데리고 가서 모두 자기 집에 들였다. 인심이 뒤집혀진 이런 때에 그 마음 씀이 얼마나 고마운지. 의형제를 맺은 지가 지금 7년이지만 정은 골육(骨肉, 피를 나눈 형제)과 같고, 교분은 한 집안과 같았다. 그의 친척인 해사(海史)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오후에 비가 와서 먼 길을 가는 것이 매우 걱정스럽고, 길에도 화적(火賊)이 많아 근심스러웠다. 주서(注書) 김영기(金永冀)가 친구들과 함께 찾아와서 감회를 나누었다.

5월 29일 을사 [二十九日 乙巳] 비가 왔다.

해사(海史) 어른과 권 도사(權都事)가 찾아왔다.

주석
시패(試牌) 과거(科擧)에서 시관(試官)의 후보자를 부르는데 쓰던 나무패를 말한다.
3망(三望) 관리를 발탁할 때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해 3명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던 일을 말한다.
말망(末望) 관리를 추천하는 3망 중에 끝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대독관(對讀官) 임금이 직접 보이는 과거에서 독권관을 보좌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던 벼슬을 말한다.
명관(命官) 전시(殿試)를 주재하도록 임금이 직접 임명한 시험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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