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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6월 1일 병오 [六月 初一日 丙午] 흐리고 가랑비가 왔다.

일본군[倭兵] 수 만 명을 장안(長安)의 사면(四面, 전후좌우의 모든 방면), 도성 밖의 사면, 연강(連江, 한강 주위)의 사면, 파주(坡州)의 임진강, 수원(水原) 대황교(大皇橋)의 주변 길,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요충지로 이동시켰다. 이외 요충지도 모두 일본 군대가 지키니 인심이 점점 변하여 노인네를 이끌고 어린애를 부축하며,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男負女戴] 꼬리를 이어 도성 안을 나갔다. 그래서 도성 밖의 10분의 9가 비었고, 길 위에 사람들의 통행이 매우 드물었다. 양반의 아녀자들은 ≪가마를≫ 타지 않고 나가는 자도 많았는데, 가마를 탄 아녀자를 일본인이 발을 걷어[捲簾] 검문을 하고 보냈다. 해괴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었다. 김 주서(金注書)가 찾아왔고, 친구들이 찾아왔다.

6월 2일 정미 [初二日 丁未] 비가 왔다.

뜻밖에 어제 내행(內行, 아내의 여행길)이 아산(牙山)의 강청동(江淸洞)에 들어간 것 같은데, 길에 화적(火賊)이 극성이어서 무사히 도착했는지 몰라 걱정스럽다. 전라도의 동소(東搔, 동학의 소요)가 아직도 대단하여 수령을 불러서 꾸짖고, 정사(政事)를 그들이 매일 고쳐서 제멋대로 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 어느 때에나 상쾌하게 씻어낼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모두 분하여 감정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도사(都事) 이호면(李浩冕)에게 이별을 하러 갔다. 위수(衛率) 조규희(趙奎熙), 승지(承旨) 김덕수(金德洙),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 감찰(監察) 유정수(柳廷秀), 교리(校理) 유진찬(兪鎭贊)이 찾아왔다. 간동(簡洞)의 동곡(東谷)에게 가서 이별을 하였다.

6월 3일 무신 [初三日 戊申] 비가 왔다.

도사(都事) 이종렬(李宗烈)이 이별을 하러왔다. 친구 박운로(朴雲路)와 유성전(兪聖全) 및 주부(主簿) 김사필(金思弼)이 이별을 하러 왔다. 서정(西亭) 어른이 아직도 서울에 머물러서 종종 찾아왔다.

6월 4일 기유 [初四日 己酉] 흐림.

친구들이 이별을 하러왔다. 하루 종일 짐을 꾸렸다. 간동(諫洞)에서 노잣돈 50꾸러미를 보내왔다.

6월 5일 경술 [初五日 庚戌] 흐리고 가랑비가 약간 왔다.

새벽에 출발하여 해사(海史) 어른과 나란히 하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상노(床奴)인 성칠(聖七)에게 집을 간수하게 하였다. 점심은 과천점(果川店)에서 먹고, 수원(水原) 남문 밖에서 묵었으나 빈대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였다.

6월 6일 신해 [初六日 辛亥] 오후에 비가 많이 왔다.

50리를 가서 진위(振威) 읍내에서 묵었다.

6월 7일 임자 [初七日 壬子] 흐리다가 맑았다.

평택(平澤) 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강청동(江淸洞)의 해사(海史) 어른 집에 들어가서 편하게 묵었다. 확재(確齋) 형제와 친구들이 모두 와서 감회를 나누었다.

6월 8일 계축 [初八日 癸丑] 맑고 매우 더웠다.

해사(海史) 어른의 환대로 다시 말 1필과 가마꾼 및 짐삯 몇 푼을 마련하여 홍주(洪州) 금현(錦峴)의 한 감역(韓監役) 집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바람이 잣기를 기다렸다가 밤늦게 나루 2곳을 순조롭게 건너 신당(新堂)의 점막(店幕)에서 묵었다.

6월 9일 갑인 [初九日 甲寅] 맑음.

새벽에 금현(錦峴)에 도착하여 아침밥을 먹고 바로 이종(姨從) 윤씨(尹氏) 댁으로 출발하였다. 내행(內行)을 금현에 머무르게 하고, 정안(定安)의 이종 윤씨 집에 묵었는데, 이모가 환대를 하였다. 강청동(江淸洞)의 가마꾼을 돌려보냈다.

6월 10일 을묘 [初十日 乙卯] 맑고 더웠다.

금현(錦峴)에서 내행(內行)이 정안리(定安理)에 와서 합류하여 길을 떠나 성현(聖峴)에서 점심을 먹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이모부(姨母夫)인 생원(生員) 윤시영(尹始榮)과 추곡(秋谷)의 종숙(從叔, 아버지의 사촌으로 당숙)이 이미 와서 있었다. 외종씨(外從氏, 외사촌)가 오후에 멀리서 찾아왔는데, 그 성의가 고마웠다.

6월 11일 병진 [十一日 丙辰] 맑음.

어머님의 회갑(回甲)일이나 미리 돌아오지 못하여 박구(薄具, 변변찮은 안주와 반찬)를 마련하지 못하니 근심스럽고 답답하였다. 이웃의 친척들과 손님들이 모두 찾아와서 변변찮은 술과 떡으로 대충 그 날을 보냈다.

6월 12일 정사 [十二日 丁巳] 맑음.

울진(蔚珍)과 함께 진사(進士)인 동필(東珌)이 70리 길을 멀게 여기지 않고 더위를 무릅쓰고 찾아오니 고마웠다. 손님들이 함께 묵었다.

6월 13일 무오 [十三日 戊午] 맑음.

손님들이 모두 돌아갔다.

6월 14일 기미 [十四日 己未] 맑음.

외종씨(外從氏)인 기현(騏鉉) 씨가 무더위에 찾아와서 그 뜻이 고마웠으나, 오늘 출발하여 수백리 길을 어떻게 온전히 돌아갈는지 걱정스러웠다.

6월 15일 경신 [十五日 初伏 庚申] 맑았으나 초복(初伏)이어서 매우 더웠다.

마을 가까이의 사람인 웅○(熊○)이 보러 왔다.

6월 16일 신유 [十六日 辛酉] 맑음.

6월 17일 임술 [十七日 壬戌] 맑음.

김명실(金明實)이 왔다가 갔다.

6월 18일 계해 [十八日 癸亥] 맑음.

갈두(葛頭)에 있는 경춘(景春)과 새로 관례(冠禮)를 한 아들 석(錫)이 보러 왔다. 몽여(夢汝)가 보러왔다. 마을 근처의 사람들이 종종 보러왔다.

6월 19일 갑자 [十九日 甲子] 맑음.

경춘(景春)이 놀러왔다. 울진(蔚珍)의 족제(族第)와 처조카 한계동(韓啓東)이 모두 돌아갔다.

6월 20일 을축 [二十日 乙丑] 폭우가 왔다.

6월 21일 병인 [二十一日 丙寅] 흐리고 비가 오며 매우 무더웠다.

6월 22일 정묘 [二十三日 丁卯] 비가 왔다.

6월 23일 무진 [二十三日 戊辰] 비가 왔다.

6월 24일 기사 [二十四日 己巳] 비가 왔다.

6월 25일 경오 [二十五日 庚午] 비가 왔다.

6월 26일 신미 [二十六日 辛未] 비가 왔다.

6월 27일 임신 [二十七日 壬申] 비가 왔다.

6월 28일 계유 [二十八日 癸酉] 조금 맑고 매우 더웠다.

연일 장마 비에 사람과 만물이 모두 해를 입었다. 날마다 근처의 사람들이 보러왔다. 서울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매우 울적하였으나, 일전에 일본 배[倭船] 3척이 내려오다가, 올라가는 청국 배[淸船] 1척을 만나 이유 없이 서로 싸움을 해서 청국 배가 패배하여 손해를 보고 본 읍의 이원(梨園)면에 다시 정박해서 인심이 어수선해졌다.

6월 29일 갑술 [二十九日 甲戌]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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