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을해 [七月 吉日 乙亥] 맑음.
청국 군 30여 명이 함부로 경내에 들어왔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산(牙山)의 청국 진영이 크게 패하고 일본군[倭兵]이 전진하여 패배한 군사가 각기 흩어져서 식량을 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7월 1일 병자 [初一日 丙子] 맑고 매우 더웠다.
서울 소식은 자세히 들을 수가 없고, 헛소문은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렵다.
7월 2일 정축 [初二日 丁丑] 맑고 더웠다.
날마다 소문을 들었으나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7월 3일 무인 [初三日 戊寅] 비가 오다가 맑고 매우 더웠다.
일본군[倭兵] 및 일본 배[倭船]가 수로(水路)와 육로(陸路)의 요충지에 없는 곳이 없었다. 아! 왜(倭)에게 해독을 입는 것이 지금부터 시작되었으나 지금의 수치를 씻을 길이 없어 매우 한탄스럽고 분하였다.
7월 4일 기묘 [初四日 己卯] 비가 오다가 맑았다.
서울에는 청론당(淸論黨, 청국을 지지하는 패)과 왜론당(倭論黨, 일본을 지지하는 패)이 있어 각각 논의를 견지하여 의혹이 진정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 급박함 때문에 왜론당의 주장에 이르게 되니 더욱 분하고 울적하였다.
7월 5일 경진 [初五日 庚辰] 비가 오다가 맑았다.
7월 6일 신사 [初六日 辛巳] 맑고 더웠다.
7월 7일 임오 [初七日 壬午] 맑고 더웠다.
사람들이 모두 요즈음 10일간의 더위는 근래에 처음 겪는다고 하였다.
7월 8일 계미 [初八日 癸未] 맑음.
파접(罷接)을 하고 율시(律詩) 1수(首)를 지었는데, 5~6명의 아이들이 해석을 할 수 있었다.
7월 9일 갑신 [初九日 甲申] 맑음.
날마다 손님이 없는 날이 없었다. 전해오는 헛소문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고, 서울 소식은 막연하여 울적하였다. 도성(都城)에는 인민(人民)이 빈 것 같고, 일본인[倭人]이 4대문(四大門)에 와서 파수(把守)를 하는데, 나가는 것은 금지하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엄중히 지킨다고 하였다. 설령 이상하지 않더라도 한심스럽다.
7월 10일 을유 [初十日 乙酉] 맑음.
7월 11일 병술 [十一日 丙戌] 맑음.
추곡(秋谷)의 큰당숙이 찾아왔다.
7월 12일 정해 [十二日 丁亥] 맑음.
큰당숙이 머물러서 허다한 감회를 말하였다.
7월 13일 무자 [十三日 戊子] 맑음.
종숙(從叔)이 돌아갔다.
7월 14일 기축 [ 十四日 己丑] 맑음.
서울소식을 듣기가 어려워서 매우 울적하였다. 손님들이 날마다 왔다.
7월 15일 경인 [十五日 庚寅] 맑음.
당진(唐津)의 하(河)씨가 자기 부친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왔다.
7월 16일 신묘 [十六日 辛卯] 맑음.
말복(末伏)이다.
7월 17일 임진 [十七日 壬辰] 맑음.
7월 18일 계사 [十八日 癸巳]
7월 19일 갑오 [十九日 甲午] 맑음.
홍주(洪州) 월현(月峴)의 참판(參判)인 족형(族兄)과 아들인 진사(進仕) 시원(始元)이 이씨와 김씨 2명을 데리고 찾아왔다.
7월 20일 을미 [二十日 乙未] 비가 오고 해가 났다.
진사(進士)와 함께 가서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추곡(秋谷)의 종숙(從叔)이 왔다.
7월 21일 병신 [二十一日 丙申] 비가 오고 맑았다.
진사(進士) 일행이 돌아갔다. 종숙(從叔)과 죽리(竹里)에 갔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7월 22일 정유 [二十二日 丁酉] 해가 났다.
종숙(從叔)과 갈두(葛頭)의 경춘(景春) 집에 가서 묵었다.
7월 23일 무술 [二十三日 戊戌] 맑음.
종숙(從叔)과 일찍 출발하여 산을 둘러본 뒤에 저물어서 김명섭(金明攝) 집에 들어가 묵었다.
7월 24일 기해 [二十四日 己亥] 비가 오다가 맑았다.
일찍 출발하여 비를 무릅쓰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추곡(秋谷)의 작은댁에 이르렀다.
7월 25일 경자 [二十五日 庚子] 비가 오다가 맑았다.
동소(東搔, 동학의 소요)가 극심해져 내포(內浦)전체에서 동학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었다. 인심이 흉흉해져 가장 먼저 봉변과 봉욕을 당한 자는 반명(班名, 양반의 명색을 지닌 사람)이었다. 양반이라는 자들은 집을 옮겨 도피하는 것을 위주로 할 뿐이었다. 동학교도는 떼를 짓고 무리를 이루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남의 무덤을 파고 남의 집을 허물었으며 결박하여 구타하였는데, 입도하지 않은 양반으로 당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인심이 누란지세(累卵之勢, 계란을 쌓아놓은 위태로운 형세)와 같았다. 도로는 가을을 맞아 황량하였고, 논밭은 모두 두 번의 김매기를 하지 못했다. 이런 때에 조정의 명령이 갑자기 내려와서 피한(皮漢)이 갓을 쓰고 칠반천인(七般賤人)이 모두 면천(免賤)을 하여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상민(常民)의 마음에는 더욱 거리낌이 없게 되었고, 노복(奴僕)들은 상전(上典)을 바로 마주하고 모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스스로 물러나서 면천을 하고 갑자기 사환(使喚)이 없으니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였다. 도인들은 일의 전후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단지 원한을 품고 보복하는 것을 주로 하였으나 도백(道伯, 감사)과 수령은 감히 금지를 못하였다. 행인은 감히 말을 타지 못하였고, 윗옷을 감히 입지 못하였다. 윗옷을 입는 자는 양반이라고 하여 옷을 찢고 말을 탄자는 잡아가서 소와 말을 빼앗기에 이르렀다. 논밭은 태반이 황폐해졌고, 교량(橋梁)은 모두 무너졌으며 길을 닦는 일은 전혀 없었다. 수십 년의 빚과 2~3대에 걸친 원한을 도리어 갚는 것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이웃마을이 서로 권장하고 친척이 권면하며 사돈 간에 서로 끌어서 끝내 동도(東道, 동학)의 경내로 들어갔다. 입도하지 않은 자는 1만 명 중에 1명뿐이었고, 무리를 지어 길을 나란히 출입하였다. 가장 먼저 해독을 입은 자는 양반명색(兩班名色)이었고, 그 다음은 요부(饒富, 부자)였다. 부자는 고개를 들어 입도해서 구차하게 그 해독을 모면하였다. 나도 전실(前室, 죽은 부인)인 송씨(宋氏)를 서산(瑞山) 미역평(彌役坪)의 남쪽 기슭에 매장한지가 16년이 되었는데, 서산의 고양동(高陽洞)에 사는 주(朱)모라는 사람이 와서 파서 옮길 것을 독촉하는 일을 당했다. 형세가 어쩔 수 없어 날을 잡지 않고 가서 이장(移葬)을 하였다. 추곡(秋谷)의 서종조모(庶從祖母)인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제사와 둘째 종숙(從叔)의 제사에 참여했다.
7월 26일 신축 [二十六日 辛丑] 맑음.
아침 일찍 밥을 먹었다. 훼손된 무덤의 피해가 매우 비참하였다. 그날 모두 염(斂)을 하고 산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큰당숙 형제와 족숙(族叔)인 상칠(商七, 자는 成七이다), 족질(族姪)인 동명(東明, 자는 聖五이다)과 동○(東○)가 와서 함께 밤을 지새웠다.
7월 27일 임인 [二十七日 壬寅] 맑음.
해미읍(海美邑)에 사는 최가(崔哥)놈에게 20년 전에 빚 400금(金)이 있었으나 공갈(恐喝)이 너무 심하여 쫓아낼 수가 없었다. 종숙(從叔)은 수레를 따라 대산(大山)집 근처의 산 아래에 갔기 때문에 내가 남아서 최가 놈에게 당오전(當五錢) 1,000냥을 마련하여 갚겠다고 무수히 애걸하고, 8월 10일까지 기한을 정하였다. 그러나 그 곤경은 붓으로 차마 쓸 수가 없다. 창동(昌洞)의 친척들이 찾아왔다. 반명(班名)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도망을 주로 하였다. 서산(瑞山)의 친척들이 낱낱이 욕을 당하였다. 소요가 점점 커져서 일본 배[倭船]가 무수히 연해(沿海)의 요충지에 흩어져서 정박하였다. 서울에는 일본을 지지하는 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남아있었고, 나머지 수구(守舊) 재상들과 관원들은 모두 고향에 내려갔다. 이 달 21일에 대궐에 침입한 일본[倭]의 소요를 어찌 차마 말로 하겠는가?
7월 28일 계묘 [二十八日 癸卯] 맑다가 비가 왔다.
추곡(秋谷)에서 족질(族姪)인 성오(聖五)와 함께 돌아왔다. 산 아래 소매남리(小梅南里)의 뒷산등성이에 새로 터를 잡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아버님이 이미 무덤을 만든 곳이고, 흙 색깔도 좋지 않아 한탄스러웠으나 이 땅은 송씨가 6~7년 전에 매장을 표시한 곳이어서 시비(是非)의 단서가 없어 무덤을 만들었다. 경춘(景春)과 성오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방금(放金)은 죽리(竹里)의 소헌(韶軒)이 해주었다.
7월 29일 갑진 [二十九日 甲辰] 비가 오다가 맑았다.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하관(下官)을 하고 묘(墓)를 만들었다. 사초(莎草, 무덤에 떼를 입혀 잘 다듬는 일)는 때가 아니면 할 수가 없어서 오전에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원두동(原頭洞)의 도인(道人) 이(李)와 여러 사람들이 와서 못된 짓을 하였으나 사정하여 겨우 큰 낭패를 모면하였다.
7월 30일 을사 [三十日 乙巳] 맑음.
이(李)가 다시 와서 논을 잰 일이 없다고 공갈을 쳤다. 그리고 도인(道人)은 애초에 경계가 없었다고 하고 논문서를 빼앗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