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진 [十月 初一日 甲辰] 맑음.
도인(道人)들이 다시 일어나 크게 늘어났다. 서산(瑞山)의 수령이 맞아죽었고, 해미(海美)는 군기(軍器)를 빼앗겼으며, 태안(泰安)의 수령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밖에 맞아죽은 양반들도 많았다. 경제(慶濟)도 죽었다고 하였다. 경제 집에 불을 지르고 도인(道人)이 모두 모였다가 나갔다. 읍(邑)과 마을마다 남자는 전부 없었고, 도인이 아닌 사람은 곤경을 겪거나 해를 입었다. 하나도 남기거나 빠뜨리지 않고 짐꾼으로 몰아가니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차마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었다.
10월 2일 을사 [初二日 乙巳] 바람이 많이 불고 비가 조금 왔다.
도인(道人)의 소란을 날마다 들으나 예측할 수가 없다.
10월 3일 병오 [初三日 丙午] 바람이 많이 불었다.
10월 4일 정미 [初四日 丁未]
도인(道人)이 난리를 일으켜서 무리를 모아 나아가니 날마다 매우 견디기가 어려웠다. 난리를 피해온 자들은 그 수를 세지 못할 정도여서 두려웠다. 마침 경제(慶濟)와 태안(泰安)수령이 모두 참수(斬首)를 당하고, 경제의 집과 크고 작은 6채의 집이 모두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남(三南, 영남 · 호남 · 호서)에서 동시에 도인이 군대를 일으켜서 3~5리(里) 사이에 보루를 설치하여 연락을 하였다. 병기(兵器)는 읍(邑)에서 빼앗았는데 읍의 수령과 목사(牧使) 및 방백(方伯, 감사)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빼앗겼다. 그들 중 조금이라도 금지하려는 수령이 있으면, 예측할 수 없는 욕을 당하고 진중(陣中)에 갇히거나 해를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주(洪州)목사 이승우(李勝宇) 만이 처음부터 동학을 믿지 않는 사람과 차력인(借力人)을 모아 군기(軍器)를 많이 만들고 군량(軍糧)을 비축하여 성(城)안에 1만 명에 가까운 군사를 모았다. 도인 100만여 명이 포위했으나 도인의 세력으로 감히 성(城)을 공격하지 못하였다. 그 승부는 아직 모르겠다. 날마다 도인이 싸움터에 나아갔으나 동학에 입도하지 않은 사람은 도망가서 산위에서 노숙(露宿)을 하였는데, 그 수효를 모르겠다. 동학에 입도하지 않은 사람을 잡아다가 구타한 것은 어디 비할 데가 없었다. 더욱이 무거운 짐을 지는 짐꾼으로 싸움터에 나왔기 때문에 모두 도망을 한 것이었다. 우리 집도 상하의 권솔(眷率)들이 두려워하며 지낼 뿐이었고, 반명(班名, 양반의 명색)이라고 하는 자들이 더욱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우리 집이 오히려 편안했던 것은 아버님이 평소에 한없는 덕(德)을 닦았기 때문이었다. 대개 덕은 말세(末世)에 더욱 통하였다. 남녀노소(男女老少)와 어린애가 난리를 피해 모두 우리 집에 와서 어수선하여 더욱 어려웠다.
10월 5일 무신 [初五日 戊申] 맑음.
오늘 아침은 생일날인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서 생일을 맞았으나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마음에 맞을 수가 없었다.
10월 6일 기유 [初六日 己酉]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7일 경술 [初七日 庚戌] 비가 왔다.
10월 8일 신해 [初八日 辛亥]
오늘은 추곡(秋谷) 안협공(安峽公)의 산소에 세일사(歲一祀, 시향) 하는 날이나 길이 막혀서 참석하지 못하니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였다. 시향(時享)은 작년부터 지내기 시작했으나 추곡의 종숙(從叔)이 이런 난리를 겪어 통지(通知)할 수가 없었다. 오늘 제사는 과연 순조롭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중종숙(仲從叔)도 우리 집에 머문 지 몇 년이 되었으나 또한 참석하지 못하였다.
10월 9일 임자 [初九日 壬子] 맑음.
문 앞의 대로(大路)는 더욱 난처(難處)한 곳이어서 소요가 더욱 많았고, 잠시도 두려워서 정말로 진정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묵수지(墨水池) 상하(上下)의 산지기의 소문을 듣고 매우 놀라, 도인(道人)의 집에 가서 묵수지의 시향(時享)을 순조롭게 지내도록 한없이 거듭 부탁하였다.
10월 10일 계축 [初十日 癸丑] 맑음.
부친을 모시고 자식을 인솔하여 일찍 묵수지(墨水池)에 가서 상하(上下) 산소에 시향을 간신히 치렀는데, 난리를 일으킨 도인(道人)이 내정(內庭)에 들이닥친다는 급보가 묵수지에 왔다. 조금 있다가 다시 ≪도인≫ 일당(一黨)들이 내정에 갑자기 들어온다는 급보가 왔고, 얼마 후에 또 일당들이 왔다는 급보가 왔다. 그러나 제사를 끝내지 못하여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그 무리들이 묵수지에서 합세하였다. 산지기와 제관(祭官)이 모두 화(禍)를 피해 도망을 가서 묘정(墓庭) 안에는 우리 부자(父子)만이 있었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4일부터 11일까지 이처럼 지냈는데, 그동안의 두려운 상황은 붓으로 쓸 수가 없다. 그 무리들은 다시 우리 집에 와서 머물다가 갔다.
10월 11일 갑인 [十一日 甲寅] 맑음.
도인(道人)들이 난리를 일으켰는데, 그 단서가 한결같지가 않았다. 조포(租包) · 돈 · 의복 · 철(鐵) 등을 창고에 넣어 봉인(封印)하고, 가산(家産) 등의 물건을 제멋대로 빼앗아가서 바로 적당(賊黨)이 되었다. 소는 빼앗아가거나 잡아먹어 ≪외양간이≫ 완전히 비게 되었다. ≪소가≫ 농사에 큰 힘이 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보리를 경작하는 자도 드물었다.
10월 12일 을묘 [十二日 乙卯] 맑음.
날마다 듣는 소문은 한없이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10월 13일 병진 [十三日 丙辰] 맑음.
진루(陣壘, 진을 친 보루)에서 수백 리에 연락을 하는 자들은 모두 흰두건을 썼다. 수령들은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욕을 당하였고, 진중(陣中)에서 죄수를 심판하는 일도 있었다.
10월 14일 정사 [十四日 丁巳] 맑음.
≪동학에≫ 입도(入道)하지 않고 난리를 피하려는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우리 집에 왔다.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어려웠다.
10월 15일 무오 [十五日 戊午] 맑음.
그 무리들이 칼과 창을 만들었다고 한다. 농가의 호미와 삽을 전부 빼앗아가서 농기구가 걱정이 되었다.
10월 16일 기미 [十六日 己未] 맑음.
이 동네는 본래 ≪동학에≫ 입도하지 않은 마을이어서 피해가 더욱 심하여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서 산위에 머물렀다.
10월 17일 경신 [十七日 庚申] 맑음.
도인(道人) 한 무리가 다시 와서 소란을 피우니 매우 두려웠다. 언제나 쉴 수 있겠는가?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10월 18일 신유 [十八日 辛酉] 맑음.
10월 19일 임술 [十九日 壬戌] 맑음.
도인(道人) 한 무리가 와서 쌀과 돈을 요구하기에 간신히 쌀 1말과 돈 10꾸러미를 순순히 주었다. 소헌(韶軒)이 인재(人才)여서 도인의 진중(陣中)에 잡혀가니 매우 걱정스럽다. 적성(積城) 오하영(吳夏泳)이 밤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10월 20일 계해 [二十日 癸亥] 맑음.
경군(京軍)이 일본군과 함께 육지를 따라 내려왔다. 홍주목사가 안에서 일을 처리하였고, 청주목사도 일을 처리하였다. 또한 연변(沿邊)의 일본군이 수로와 육로에 많이 정박하고 아울러 전진하여 도인(道人)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인들이 모두 화를 피해 도망가기를 주로 하였고, 각각의 진영에서는 도인과 속인(俗人, 동학교도가 아닌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잡아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일대의 경내가 흉흉하여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으니 언제 나 쉴 수 있겠는가?
10월 21일 갑자 [二十一日 甲子] 맑음.
소문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추곡(秋谷)의 종숙(從叔)이 집에 머문 지 3년이 되었으나, 그의 백씨(伯氏, 큰형)의 집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무사히 도착했는지 알지 못하여 걱정스러웠다. 율리(栗里)의 족인(族人)도 난리를 피해 우리 집에 들어와서 20일을 머물다가 함께 돌아갔다.
10월 22일 을축 [二十二日 乙丑] 맑음.
죽엽리(竹葉里) 최관오(崔寬五)의 장지(葬地)와 오 적성(吳積城)의 집에 갔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10월 23일 병인 [二十三日 丙寅] 맑음.
배청련(裵靑蓮)이 도인(道人) 7~8명을 데리고 밤에 찾아왔다.
10월 24일 정묘 [二十四日 丁卯]
난리를 일으킨 도인(道人)이 무수히 바다에서 건너와 정박했다고 하니 갑자기 놀라고 두려워졌다. 이웃에 사는 문승만(文勝萬)이 장가를 가서 다시 이동(梨洞)의 혼인집에 보러갔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5일 무진 [二十五日 戊辰]
날씨가 4월과 5월보다 따뜻하니 이상하다! 우기(雨氣)로 연일 습하였다. 홍주(洪州)의 유당(儒黨, 유생으로 조직된 군대)이 덕산(德山) 등지에 주둔하여 도인(道人)이 감히 상대하지 못하고 모두 흩어졌다. 도인(道人)이 두려워서 가야산(加倻山) 안의 4곳으로 해산하고 100여 곳에 진(陣)을 세웠으나 감히 산을 넘지 못하였다. 여미(餘美) 등지의 60여 개 진은 홍주사람이 추격해 오는 것을 보고 모두 도망하였고, 죽음을 당한 자도 많다고 하였다. 이 동네에는 소 1마리 만 남아 있다. 지난 밤 같은 마을의 도인(道人)이 다시 소를 빼앗아 잡아가서 우리만 소 1마리를 가지고 있으나 보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을사람이 이처럼 염치를 돌아보지 않는데 오히려 어찌 다른 것을 말하겠는가? 우리 집 송아지는 이웃집에 맡겨 키웠는데, 여러 번 빼앗겼다가 되찾았다. 마을의 도인이 어제 다시 와서 무상(無狀, 사리에 어긋난 행동이나 말)한 말을 했으나 간신히 애걸하여 ≪송아지를≫ 지켰다. 10월부터 시장이 전폐하여 ≪물건을≫ 사고 팔 수가 없으니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반명(班名)이나 부자는 것들은 모두 먼저 도망을 가서 겨우 실낱같은 목숨을 보존하였다.
10월 26일 기사 [二十六日 己巳] 맑음.
도인(道人)이 날마다 홍주성(洪州城)을 치려고 했으나 홍주목사의 방어가 매우 치밀하여 마음을 먹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동학교도의 진영은 여미(餘美)에서 당진(唐津)에 걸쳐 산천(山川)에 진(陣) 1곳을 두었다. 당진 승전곡(勝戰谷)에 진을 두었으나 깨진 뒤에 진들이 덕산(德山)의 여러 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죽리(竹里)에 갔다가 병을 얻어 몸에 열이 나고 관절이 아팠다. 밤에 너무 아팠다.
10월 27일 경오 [二十七日 庚午] 맑음.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10월 28일 신미 [二十八日 辛未] 맑음.
병이 완쾌되지 않았으나 도리어 목에 병이 났다. 목병의 증세는 소금물을 밤낮으로 입에 머금으면 효과를 보았다. 목구멍에 병이 나면 처음에 소금물을 입안에 늘 머금으면 저절로 심해지지 않는데, 여러 번 시도하여 효과를 보았다. 도인(道人)이 반드시 홍주(洪州)읍을 토벌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패하여 피해를 입었다. 총에 맞아죽은 수천마리의 소들이 도로에 이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상중(喪中)의 조응칠(趙應七)이 찾아왔다.
10월 29일 임신 [晦日 壬申] 밤에 비가 왔다.
병이 완쾌되지 않아 약 2첩을 먹었다. 패배하여 돌아온 도인(道人)을 셀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