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계묘 [十二月 初一日 癸卯] 맑고 추웠다.
오는 사람이 어제와 같았다.
12월 2일 갑진 [初二日 甲辰] 맑고 눈이 왔다.
밥을 먹은 뒤에 유소(儒所)에 갔다. 이 참봉(李參奉), 김 찰방(金察訪), 성 석사(成碩士), 손 석사(孫碩士), 김 생원(金生員)과 각 마을의 회장(會長)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3일 을사 [初三日 乙巳] 맑음.
하루 종일 사람이 모였다가 지나갔다. 각 마을의 회장들이 차례대로 잠시 집에 돌아갔으나 친구 성(成)과 밤을 지냈다. 비도(匪徒)의 우두머리와 전봉준(田鳳俊, 全琫準의 오기)을 토벌했다고 한다. 수십 줄의 윤음(綸音, 임금이 특별히 내린 글)이 한문과 한글로 갑자기 내려왔다. 순무사(巡撫使)의 방시문(榜示文, 내걸어 알리는 방문)과 초토사(招討使)의 방문(榜文)을 전파하였는데, 모두 글의 뜻이 간절하였다. 전후에 걸쳐 다친 사람들이 1만 명에 이르고, 다른 도(道)와 내포(內浦) 근처의 10개 읍 밖에서 다친 사람들은 아직 알 수가 없다. 서울은 일본인이 성(城)에 가득하다고 한다. 비류(匪類)의 난리는 강원도 · 황해도 · 경기도의 몇 개 읍, 충청도의 각 읍, 경상우도(慶尙右道, 낙동강의 서쪽지역)의 여러 곳에서 전후에 걸쳐 차례대로 토벌하고 겨우 귀화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경병(京兵)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폐단을 저지르는 것도 많고, 유회인(儒會人)도 도적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폐단이 여러 가지여서 걱정스럽다.
12월 4일 병오 [初四日 丙午] 맑음.
포수(砲手)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 숫꿩 1마리를 잡아 제수(祭需)로 쓰려고 들였다. 고조할머니 공인(恭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제삿날이어서 집에 돌아오다가 지나가는 길에 정자동(亭子洞)의 친구 윤(尹)씨를 찾아갔다.
12월 5일 정미 [初五日 丁未] 맑음.
손님들이 하루 종일 보러 와서 밤까지 번잡했다.
12월 6일 무신 [初六日 戊申] 맑음.
사람들이 어제와 같았다. 할머니의 제삿날이서 재계(齋戒)를 하였다.
12월 7일 기유 [初七日 己酉] 맑음.
우리 동네가 기은곶(其隱串) 마을과 함께 웅도(熊島)의 수가(收家)에 들어갔다. 이것 때문에 2개 마을사람들이 보러 와서 어수선하였다.
12월 8일 경술 [初八日 庚戌] 맑음.
목치(木峙)의 유소(儒所)에 가서 김 생원(金生員) · 손 석사(孫碩士)와 함께 묵었다.
12월 9일 신해 [初九日 辛亥] 맑고 추웠다.
홍주(洪州) 매령리(梅嶺里)의 족제(族弟) 형제가 찾아왔다. 창동(昌洞)의 족숙(族叔)과 족제가 찾아왔다.
12월 10일 임자 [初十日 壬子] 맑음.
동도(東徒)가 점차 사방에서 잦아들었고, 동도를 잡는 것도 느슨해졌다. 구슬픈 소리도 줄어드니 다행스럽다. 사방에서 시장이 열리고 상려(商旅,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가 다니기 시작했으나 물가가 너무 비쌌다.
12월 11일 계축 [十一日 癸丑] 맑음.
12월 12일 갑인 [十二日 甲寅] 맑다가 밤에 안개가 끼었다.
섣달 날씨가 2월처럼 따뜻하니 이상하였다. 날마다 각 마을의 회장들이 번갈아서 계속 왔다.
12월 13일 을묘 [十三日 乙卯] 맑음.
12월 14일 병진 [十四日 丙辰] 맑음.
날마다 번잡하여 정신을 모으기가 어려웠다.
12월 15일 정사 [十五日 丁巳] 맑음.
구진(舊鎭)의 시장은 여전히 장(場)을 열었다. 태안(泰安)의 문(文)씨 일도 매우 번잡하였다.
12월 16일 무오 [十六日 戊午] 맑고 추웠다.
고조(高祖)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였다.
12월 17일 기미 [十七日 己未] 맑음.
경춘(景春)의 사위 일 때문에 태안(泰安)의 관아에 가서 방어사(防禦使) 이희중(李熙重)을 보고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늦게 돌아와서 여관에 묵었다.
12월 18일 경신 [十八日 庚申] 맑고 추웠다.
태안(泰安)에서 돌아와 바로 유회소(儒會所)에 묵었다.
12월 19일 신유 [十九日 辛酉] 맑고 눈이 왔다.
추곡(秋谷)의 종숙(從叔)이 돌아왔는데, 창동(昌洞)의 진사(進士)와 큰당숙의 편지를 함께 가지고 왔다.
12월 20일 임술 [二十日 壬戌] 눈이 오고 추웠다.
12월 21일 계해 [二十一日 癸亥] 맑고 추웠다.
12월 22일 갑자 [二十二日 甲子] 맑고 추웠다.
날마다 각 마을의 회장들이 번갈아 와서 함께 모든 일을 보았다. 서울의 소식을 들었는데, 개화(開和, 開化의 오기)가 크게 펼쳐지고 각사(各司)가 통합되어 몇 개의 관서로 되었으며, 풍속이 모두 바뀌어 일본인의 풍속을 일제히 따랐다고 하였다. 또한 북도(北道, 함경도)와 평안도 이외에 6개 도(道)가 모두 동학의 피해를 입어 군대를 보내 토벌하지 않은 곳이 없고, 괴수 중에 죽은 자가 많은데, 그 중에 김개남(金介南, 金開南 · 金開男의 오기)과 전녹두(田彔斗, 全綠豆의 오기)도 죽임을 당했다니 통쾌하였다. 본읍의 수령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어 유회소를 폐지한다고 하였다.
12월 23일 을축 [二十三日 乙丑] 맑음.
강당(講堂)을 설치하는 일로 마을의 회장 몇 명이 본 읍의 수령 어른 앞에 가서 아울러 유회소(儒會所)를 폐지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12월 24일 병인 [二十四日 丙寅] 맑고 추웠다.
읍에 들어간 사람이 돌아왔는데, 수령 어른이 말하기를 “강당을 ≪설치하는≫ 일은 긴요하지 않아 우선 정지하고, 유소(儒所)를 폐지하는 것은 허락한다”고 하였다.
12월 25일 정묘 [二十五日 丁卯] 추웠다.
보장(報狀)을 올려 유회(儒會)를 폐지하라는 뎨김[題, 수령에게 올린 민원서의 판결문]을 얻었고, 다시 이것을 하체[下帖]하였다.
12월 26일 무진 [二十六日 戊辰] 맑고 추웠다.
쌓인 일들을 대략 마감(磨勘)하고 저물어서 집에 돌아왔다.
12월 27일 기사 [二十七日 己巳] 눈이 왔다.
도리동(道利洞)으로 이사를 간 종숙(從叔)의 집에 갔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12월 28일 경오 [二十八日 庚午] 맑고 추웠다.
유회(儒會)를 폐지한 뒤에도 서산(瑞山)에서 사리에 어긋난 일이 일어나 심부름꾼의 보고가 연달아 이르니 기쁠만하였다.
12월 29일 신미 [二十九日 辛未] 맑음.
통문(通文, 여러 사람이 돌려보는 통지문)에 답장을 써서 여러 곳에 보냈다. 서울은 날마다 개화(開化)를 일삼아서 조정의 신하들은 검은색으로 온 몸을 걸쳤고, 제도가 모두 바뀌었다고 하였다. 탑동(塔洞)의 김덕후(金德厚)집에 가서 나무 1그루를 샀다. 오후에 눈이 와서 눈 속에 목치(木峙)에 들러 묵었다.
12월 30일 임신 [三十日 壬申] 맑고 추웠다.
말과 노새일로 서산에 보장(報狀)를 내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본 읍의 수령이 편지와 고기 5근(斤)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