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 1일 [九月初一日] 맑음. 다시 죽리에 가서 윤(尹)과 정(鄭) 두 친구를 만났다. 점심을 먹은 뒤에 다시 길을 떠났는데, 친구 윤사극(尹士克)이 그 막내동생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누이동생이 노성 반곡의 족인(族人) 집에서 혼담이 있었기 때문에 종형과 함께 가기를 바랐다. 날이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다. 이미 그저께에 연기(燕岐)의 형수 임씨가 출가를 하였다. 난리 중에 사람 일이 이와 같은가? 다만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종형이 친구 윤(尹)과 함께 노성을 향해 떠났다. 오후에 길을 떠나 반교에 들어가니 날이 저물어서 석우 이씨집에 투숙하였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반교에 도착했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초 5일 [初五日] 맑음. 거문(巨門) 이선생(李先生)이 이른 새벽에 왔고, 서천 구(具)씨가 따라왔다. 밥을 재촉하여 먹고 서천을 향해 떠났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초 7일 [初七日] 맑음.
초 8일 [初八日] 맑음.
초 9일 [初九日] 맑음. 종형 및 매제(妹弟) 조(趙)와 함께 거문에 갔는데, 이선생이 집에 없고 날은 저물어서 아랫마을 낙여(洛汝)의 집에 가서 묵었다.
초 10일 [初十日寒露] 맑음. 아침에 다시 마을에 올라가니 이선생이 밤에 돌아와서 막 한양으로 떠날려고 하여 함께 동행하여 북두문(北斗門)에 이르러 헤어졌다. 친구 조(趙), 조경장는 거문에 남아 그 백씨(伯氏)를 기다리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제인 조(趙)가 거문에 4칸 집을 사서 은거할 계획으로 먼저 선생을 거처하게 했고, 그 울타리 건너 6칸 집이 있는데 또한 최씨네 집터였다. 친구 조경장(趙敬長)이 그것을 사려고 120금에 값을 정하고 오늘 값을 치르기로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매제인 조(趙)씨 형제가 왔으나 돈은 치르지 못했다.
11일 [十一日] 맑음. 친구 조경장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은현(隱峴) 권진사 종진(種振, 자(字) 성지(聲之)이다)을 찾아갔는데, 바로 전운장(轉運丈)이 부리던 자로 재물을 모아 살만하였고 사람됨이 신실(信實)하여 함께 일을 할 만하였다. 친구 조(趙), 조경장가 그와 심정이 통했기 때문에 만나보고 도움을 구하였다. 권(權), 권종진도 이런 뜻을 가진 지가 오래되어 대략 배치한 것이 있고 삼굴(三窟)을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흔쾌히 허락하고 먼저 250금의 전표를 써서 주어 찾아 쓰게 하였다.
12일 [十二日] 맑음. 길을 떠나 범암에 도착하였고, 날이 저물어서 서천 계룡(鷄龍)에 이르렀는데, 바로 친구 조(趙)의 거처였다. 중도에 민오위장(閔五衛將)과 이석사(李碩士) 민도(敏道)를 만났다.
13일 [十三日] 맑음. 짐꾼 1명을 얻어 웅포로 향하다가 동죽(東竹)에 들러 조옥구(趙沃溝)를 위문하였다. 한 달 전에 장모(丈母)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길을 떠나 신성리(新成里) 나루터 주점(酒店)에 이르러 위원 집의 종인 석분(石奮)을 만나 위원이 어제 기호(岐湖) 집에서 모친상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놀라움을 그만둘 수 없어 바로 가서 곡을 하려고 했으나 짐꾼을 하루 종일 허비하게 할 수가 없어 강을 건너 웅포에 도착했다. 이생원(李生員) 군오가 기호에서 소요를 피해 왔고 서만길(徐萬吉)이 왔는데, 설사병이 매우 심하였다.
14일 [十四日] 맑음. 주가(主家)에서 유치전(留置錢) 100금을 찾고 궤짝에 있는 돈 5냥을 내어 여비에서 남은 돈을 합치니 6냥이 넘었다. 104냥은 짐을 꾸렸고 2냥 5전은 짐꾼이 썼는데, 태가(駄價) 1냥 6전을 제외하면 9전은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이었다. 강을 건너 길이 나뉘어져 기호에 도착했다. 이 날 집안에 중상(重喪)의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15일 [十五日] 맑음. 돌아오는 길에 계룡에 도착하였다. 잠시 뒤에 안애(鞍厓) 박노인이 왔는데, 이웃에 인척(姻戚)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달빛을 이용하여 친구 조(趙)와 함께 범암에 돌아왔다. 사돈어른이 담(痰) 때문에 평안하지 못하였다. 동요(東擾)가 어느 곳이나 그렇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범암과 문장(文章)의 조씨들이 아주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사돈어른이 거기에 있는데 편안하게 조금의 일도 없는 것은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16일 [十六日] 맑음. 종 1명을 데리고 어은현(漁隱峴)에 갔는데, 지난번에 25조 전표를 물렸기 때문이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객주가 다시 150금의 전표를 써서 범암의 종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반교로 돌아갈 때에 주인이 말하기를, “홍산읍의 시장에서 60금을 찾을 것이 있으니 지나가는 길에 찾아서 쓰라”고 하였다. 조치(鳥峙) 임(林)씨와 함께 가서 시장에 들어가 그 사람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날이 늦어져서 마침내 임(林)씨와 헤어져 돌아왔다. 구반령(九盤嶺)을 넘어 잠영리(簪纓里) 뒷고개를 통해 월명산(月明山) 금지사(金池寺)에 올라 다리를 쉬고 절 뒤쪽 길을 따라 반교에 도착했다.
18일 [十八日] 맑음.
19일 [十九日] 맑음. 경삼과 함께 거문에 갔는데, 집값을 보내주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이미 어제 도착하였다. 최씨와 학여를 만나보고 두 집의 문권(文券)을 만들었다. 4칸 집에 헛간 2칸이 덧붙여졌고 여자(麗字) 밭 1석(石)락지·논 3승(升)락지·감나무 2그루·대추나무 3그루·밤나무 3그루였으며 결(結)은 10복(卜) 6속(束)이고 돈으로는 130금(金)이었다. 새 패지(牌旨) 1장에는 6칸 집에 여자(麗字) 텃밭 1두(斗)락지·밭 2석(石)락지·결(結) 24복 5속·뽕나무와 과일나무 80여 그루·논 1배미(夜味)이고 돈으로는 120금이었다. 임진(壬辰)년 3월에 노비가 용업(龍業)인 패지와 갑오년 1월에 노비가 성돌(成乭)인 패지 2장과 새로운 패지 1장이었다. 대개 패지를 가지고 서로 매매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었다. 최씨쪽 문권에서 노비 이름은 정득(正得)이었다. 지금 이런 배치는 같은 배를 타고 서로 구제하는 것과 같다. 집과 양식을 사는데 이쪽저쪽을 논하지 않고 다만 그 노동력의 여하에 따랐다. 그리고 6칸 집은 웅포에서 나누어 준 조(條)를 보냈을 것이다.
20일 [二十日] 바람이 불고 흐렸다. 범암에서 경삼을 보내고 혼자 반교로 돌아왔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22일 [二十二日] 맑음. 길을 떠나 안애 박노인을 들러서 보았다. 망건을 만드는 만경(萬頃)사람 유양숙(柳良叔)을 만나 동행하여 돌아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동생 근영의 생일날이다. 임천 이경화와 그 재종씨(再從氏)가 왔다가 바로 떠났다. 유(柳), 유양숙로 하여금 망건을 새로 만들게 했는데, 부친이 복(服)을 벗은 뒤에 아직 갓과 망건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25일 [二十五日霜降] 맑음. 묘시(卯時)에 형수가 딸을 순산하였다. 설사 증세가 있었는데, 낫지 않아서 더욱 걱정스러웠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돌아가신 할머니 정부인(貞夫人) 나주 임씨 기일이라서 맥종(麥種) 18두를 반교로 보냈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고모부 서상원(徐相元)이 새로 비인현감을 제수 받아 일정을 재촉하여 임소에 나아갔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는데 그의 둘째아들이 따라왔다.
28일 [二十八日] 흐림. 비인현감이 할머니산소와 서조모(庶祖母) 묘소를 찾아뵙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내종(內從)이 패도(佩刀)와 고문(古文)중에 『구양수문집』 1권을 빌려갔다. 반곡의 자형이 어제 왔다가 오늘 떠나갔다.
29일 [二十九日] 내용 없음
30일 [三十日] 맑음. 중리의 포(包)에서 일제히 본 읍에 들어와 군기를 함부로 탈취하기에, 어떤 이가 옳지 않다고 하니 바로 그쳤다. 구실을 대기를, “성을 지킨다”라고 하였다. 마을의 사대부 집들이 모두 그 신주(神主)를 땅에 묻고 곡을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